두 번째 생일

음력과 양력이 일치하는 생일, 기억에는 두 번째 맞는 생일이다. 내가 태어난 게 누군가에게 고마운 일일 수 있을까. 손끝에서 타는 담배를 보며 소멸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덩어리로 떨어지던 재가 바람에 폴폴 날아다녔다.

그게 얼마나 큰지 나는 몰랐다. 내가 아는 세상만 알 뿐,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긴, 한번은 올 줄 알았던 지도 모른다. 그만큼은 나도 기다렸으니까. 이제, 때를 기다리며 잔뜩 웅크린 벌레처럼, 터질지언정, 그저 꿈틀거리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누군들 알 수 있을까. 그렇게 한 세월 가고 나면, 터져서 붉게 물든 서산이 무엇을 노래하는가를.

휴일 일기

토요일, 맑은 가을날, 월드컵 경기장 뒤편 산을 올랐다. 여러 인연들이 모인 모임, 더러는 빠지고 더러는 그대로였으나, 빠진 자리가 커보였다. 다들 왕복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산을 세 시간 걸려 완주했다. 0124님, 서연이, 웃음 고운 그 분, 그 분의 초등학교 동기, 이렇게 서연이의 발걸음에 맞춰 후미에 올랐는데, 산 위에는 삼십 여분 늦게 도착하였으나 아래에는 길을 잘못 든 일행들보다 오히려 일찍 도착하였다. 가파른 길도 꽤 있었는데, 그러고도 이 녀석은 힘이 남아도는지 펄펄 날아다녔다.

별 특색 없이 밋밋한 산 같으면서도 큰 산을 모양 그대로 줄여놓은 것처럼 오르내리는 재미가 있었다. 무언가는 비우고 무언가는 채운 느낌, 알 수 없는 호흡을 갖고 돌아왔다.

새벽에 깨었다가는(위의 글을 쓰고) 아침에 잠이 들고, 다시 낮잠도 곤히 잔 일요일, CGV 대구 5관에서 제8회 대구단편영화제 중 초청작2를 보았다.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가지, 다리들, 열정 가득한 이들, Muscle Man, 프랑스 중위의 여자, 진영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햇살” 후배 백승빈 군의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으로 제6회 미쟝센단편영화제 공포판타지부문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이다. 녀석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강렬했다. 2006년 4월 한국에 온 일본 락큰롤 밴드 ‘기타 울프’에 대한 다큐멘터리,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가지가 신선했다. 그 세가지는 그들에 따르면 가오, 근성, 액션.

영화 시작 시간과 0124님을 기다리는 동안, 영화관 입구인 6층 난간에 턱을 괴고 5층 매표소에 떠다니는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문득 각양각색의 발랄한 물결 속에 나 혼자만 괴리된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듯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 잠시 침잠하는 동안 뜬금없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것이라는, 그저 아무렇게나 내팽개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어떻게든 한번 부여잡고 싶은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햇살” 후배 몇 명과 잠시 이야기 나누다가 언뜻 돌아가는 한 뒤태에 놀라 마음이 서성이기도 했다.

자다 깨는 일이 잦다. 그럴 때면 이런 저런 꿈도 꾸고 길도 헤맨다. 짧은 글도 짓고 모르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시방 본 나무, 그 나무에 핀 꽃은 낯설었다. 낯가림이 있는 내가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낯선 길에 핀 낯선 꽃. 좌우도 사방도 대칭이 아니었다. 잠깐 손을 내밀어, 흔들다, 깨었다.

산행

단체로 산행을 했다. 헐티재에서 대견봉을 올라 유가사로 내려오는 길, 험한 오르막이 없어 걷기 좋았다. 정상까지 겨울이었다가 내려오면서 다시 가을을 만났다. 그 가을이 반가워 여러 노래를 불렀다. 일행을 두고 600번 버스를 타고 오래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먼 여행을 다녀온 듯 잠이 달았다. 비슷하구나, 비슷한 게 많구나, 생각했다. 술만이 아니라 아끼기 어려운 게 또 있구나, 생각했다.

다시, 사랑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저 뒷모습이 보였을 뿐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아무런 약속은 없어도 서로가 기다려지겠지요 행여 소식이 들려올까 마음이 묶이겠지요
어쩌면 영원히 못 만날까 한번쯤 절망도 하겠지만 화초를 키우듯 설레이며 그 날을 기다리겠죠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모든 것 그대로 간직해요 다시 우리가 만나는 날엔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해바라기의 ‘지금은 헤어져도’가 며칠째 머릿속에 뱅뱅 돈다. 방배동 카페에서는 비틀즈의 미셸과 함께 일부러 신청해 듣기도 했다. 계속 소리 내어 흥얼거리다보면 다음 세상도 틀림없이 있을 것 같고, 벌어먹고 사는 일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충만한 기분이 불안하다. 문득, 김수영의 ‘사랑’이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M6 열여덟 번째 롤

지난 일요일, 모처럼 산엘 올랐다. 서연이가 잘 걸어준 덕에 충혼탑 옆 주차장에서부터 약수터 조금 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저녁에 신천이라도 매일 걸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정색을 하고 책으로 펴낸 글보다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더 살갑고 재미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웹에서는 뜻은 좋으나 여러모로 문장이 난삽하여 얻을 것만 얻고 지나치게 되는데 막상 펴낸 책은 잘 다듬어져 있어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다. 앞의 것은 정민의 책 읽는 소리를 다 읽고나서 느낀 것이고, 뒤의 것은 우석훈의 책들을 짧게 훑어보고 느낀 것이다. 선비의 삶을 비롯하여 옛글을 읽는 재미야 유별난 데가 있지만(특히 정민처럼 문장이 좋은 경우에는 더욱), 한 가지, 술 익었다 대신 부르러 가고 편지 전하러 가는 종놈이나 당시 세상을 떠받치던 생산자들의 눈과 세계는 어쩐단 말이냐,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조선일보 기고 글이 많아서일까, 괜한 트집이라도 잡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킹콩을 빌려다 봤는데, 다른 건 다 몰라도, 킹콩이 많은 일을 끝낸 것처럼 앉아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은 오래 안 잊혀질 것 같다. 그 장엄함과 우수라니.

평생 마실 술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노을처럼 오래 오래 붙들고 싶다. 인정이고 술이고 아낄밖에.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후지 오토오토400

M6 열일곱 번째 롤

마음에 바람 불고 늦게 난데없이 비 내리던 날 그때, 그리고 녀석의 네번째 양력 생일날.

어쩌다 여의도에 갈 때마다 대통령 후보를 만나게(?) 되는데, 지난 대통령 선거 때에는 당시 민주당 경선 후보이던 노무현을 욕탕 안에서 만나 목례를 주고받은 적이 있으며, 얼마 전에는 탈의실에서 후보 확정 직전의 이인제를 만나 악수를 나눴는데, 이번에는 야밤에 맥주 한잔하다 권영길 후보와 일행들을 만나 몇 차례 악수를 하고 몇 마디 말도 나눴다. 일행 중 한 분은 자꾸만 나에게 면이 익다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이번에 난생 처음 한강 유람선을 타보았다. 누구라도 한 번 타보고는 다시 타진 않을 것 같았지만(만나는 상대가 바뀐다면 모를까), 뱃전에 서서 바람을 맞는 기분이 상쾌했다. 조각난 달이 계속 따라다녔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포트라160vc

사랑

아껴야겠다. 시간이나 사람은 몰라도, 술은.

* 오래된 퀴즈 하나. ‘O끼고 O하는 게 사랑이다’의 O에 들어갈 말은? 알고 나면 당연한 것 같지만 맞히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정답은 아, 위. 그러게 이제야 이들을 더 사랑하려 할 따름인 게다. 마치 섬광이 일듯 ‘술을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긍정적 사고의 힘인가, 평화가 흐르고 힘이 불끈 솟는다. 기특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 벤을 기리며 오랜만에 잭콕을 먹고, 그리운 소주를 먹었다. 잘 가, 벤.

Leaving Las Vegas

술자리 내내, 모처럼 밤길을 걸어 집에 오는 내내,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떠나지 않았다. 무리 속에서 혼자 벤을 생각하며, 벤과 대화하며 술을 먹었다. 그를 생각하면 더 큰 잔에 술을 붓고, 더 자주 잔을 들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잘 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에 바빴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羑里에서처럼 빤히 내다뵈는 걸 받아들이는 육조의 심정이었을까, 이제 그렇게 다 버리고만 싶었던 것일까, 종내 갈 수밖에 없는 시간의 가르침을 그저 따라간 것 뿐일까, 얼마 전 술 마실 적 심정으로 미루어 대꾸할 뿐, 더 오래 잔을 나누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게 한 생애에 주어진 사랑과 ‘행복’은 유한할 터,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I’m Ben. I’m Sera. Sarah, with an ‘H’? With an ‘E’, S-E-R-A, S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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