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바람이 불고 떠날 사람은 떠났다
세상은 조금 더 시시해졌고
취하는 재미 따위 나는 오래전에 잊었다
소식이야 어떠랴
남은 사람은 없고 뜬소문 같은 눈이 내린다
* 살다 보면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하고 별 거 아니던 것이 귀해지기도 한다. 준비란 대개 그런 거다.
겨울이다 바람이 불고 떠날 사람은 떠났다
세상은 조금 더 시시해졌고
취하는 재미 따위 나는 오래전에 잊었다
소식이야 어떠랴
남은 사람은 없고 뜬소문 같은 눈이 내린다
* 살다 보면 소중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하고 별 거 아니던 것이 귀해지기도 한다. 준비란 대개 그런 거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같이 늙어간다는 기분만큼 좋은 게 있을까 싶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술자리든 아니든.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낡아가되 새로워진다는 것이 이런 건 줄 몰랐다. 단기 기억이 예전 같지 않고 오랜 기억도 잊어가지만 그게 또 좋은 거였구나 싶고. 늦은 겨울이 온다. 눈물 같은 겨울. 가을이 버린, 봄이 묻은 겨울이.
애틋하고 아린 마음들은 다 어디로 갔나 모르겠다. 그렇게 예뻤던 얼굴들도, 꼭 안고 싶던 고운 마음씨들도 다 사라져 버리고, 흐린 기억만 남았다. 청춘처럼 다들 덧없이 가버렸다.
어제, 그끄제 모처럼 술을 조금 마셨다. 언제나 함께 있을 줄 알았던 어떤 것들이 그새 없어지고 말았다. 다음은 법정의 아름다운 마무리 중 일부. 책장을 정리하다 오래전 선물 받고 넣어 둔 걸 발견하였다. 그 시절을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다. /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 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
겨울엔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에서 아직 몇년째 휴학 중인 절름발이 친구와 사나흘 술이나 마시면 좋겠네.
연탄불은 가끔 꺼지고, 입김이 서로의 얼굴을 가리는 흐린 방에서 산 넘어 동쪽에서 온 여인과 또 그의 젊은 애인과 실직한 후배와…. 이렇게 꾸벅꾸벅 졸며 양미리를 구우며 막걸리 병을 쓰러뜨리며 어떤 기다림에 온종일 귀를 기울이면 좋겠네.
술만 먹다가 죽은 후배 이야기를 하면서, 불운한 연애 끝에 죽은 여인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에서 헤어진 후 영영 소식 끊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 살아남아 양미리를 굽는 우리의 손등을 바라보리. 취해가는 인생을 바라보리. 아직 파랗고 선량한 가난과 비참을 바라보리.
그러나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이여, 절름발이 친구여, 이제는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겨울만 남았고나. 이름 부르면 곧 달려올 것 같은 우리의 가난과 비참만 남았고나. 고지서 같은 세월이, 독촉장 같은 인생이 쓰러진 막걸리 병처럼 도처에 나뒹군다. 아아,
팔십여 일 되었구나. 술을 멀리하는 동안 이상하리만치 술 생각이 나지 않더니, 류근의 이 작품을 보고 잠시 술 생각이 간절하였더랬다. 그래, 큰물이 일 때에는 물속에서도 수그리는 것이 상책이다. 어디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고 안다 한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렴.
마음을 따르기는 쉽지만 머리를 따르기는 어렵고, 죽음은 증상이 아니라 결과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다. 어떤 날은 반나절에 반평생이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나절이 열두 번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엿새 후에 해가 저물 때 비로소 한 세상이 저물기도 한다. 갈 곳 없는 마음이 집을 찾기도 하고, 뱁새처럼 비비빕비 울기도 한다.
* 오늘로 여기 온 지 딱 오십오년이 되었다. 지나온 날들과 지나갈 날들이 다 아쉽고 쉽지 않을 테지만, 먼저 간 마음 잘 따라가리라 믿는다.
세상일이야 본디 시시하고 경이로운 것. 만물은 태생이 하나라 어떤 화두든 오래 붙들고 있으면 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다시 새로운 질서가 온다고 한다. 가만히 숨었다가 천천히 움직이라고, 심장 같은 건 허공에 두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으라고.
술과 커피, 차를 마시지 않고 먹는 걸 줄이면서 뭘 안 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안 하는 걸 하는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먹는 즐거움, 마시고 취하는 즐거움, 뭔가를 하는 즐거움 못지않은 이 하지 않는 즐거움이 좋다. 더할 길 없어 빠지는 거면 어떠랴. 세상일이야 본디 시시하고 경이로운 걸.
집착이나 중독에서 벗어나, 술을 멀리하고
카페인도 줄이고 책도 좀 읽고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기.
인정을 아끼고, 몸과 마음을 단정히.
* 얼마나 알아야 준비가 되는 걸까. 얼마나 알아야 괜찮은 걸까.
동면에서 막 깨어난 듯, 몇 군데 필름이 끊어진 것 같은 상태로 구월을 보내고 있다. 정신머리가 술에 익숙하니 그런가, 술을 멀리하는 동안 꼭 잔뜩 취한 것처럼 머리 회전도 잘 안 되고 말이 맥락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다시 익숙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글쎄다, 못난 놈이 식물의 지혜를 익히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종일 비가 내리고, 이제사 진짜 가을이 올 모양이다. 모처럼 거실에서 듣는 빗소리,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정겹다. 그래, 그만하면 본성을 거슬러 오래 왔다. 나이를 먹으면 묵묵히 받아들이거나 포기할 줄 알게 되지. 이것도 자연의 섭리겠다. 먼길을 가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법이라더만, 참으로 위없을 일이로다.
배우기 싫어도 배우게 되는 게 있고,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게 있더라. 아무려나, 기다린들 더는 서두를 일 없다. 어서 가자, 애써 이를 일 없다. 어리석은 것이 차마 닮지 말 것은 닮지 말자, 꼭꼭 이를 뿐.
뭔가 알 것 같고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을 때가 있는데 대체로 이미 늦었다는 감도 같이 들게 마련이다. 근데 이게 막상 늦어도 늦은 게 아닌 거고, 길을 걷다 보면 어제를 걷기도 하고 내일을 걷기도 하는데 이게 또 오늘을 제대로 걷게도 하는 거다. 심연은 무슨 색일까. 파란 하늘, 새파란 바다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같은 눈, 같은 마음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갈 길이 아직 멀다.
* 늘 술과 함께하던 생을 바꿔 보기로 한다. 갈데없는 마음도 쓸데없는 미련도 버리고.
한 사람이 온전히 다 궁금할 때가 있었다. 온전히 다 그리웠던 적도. 긴 여름이 가고 문득 가을이 오듯, 잠깐 졸았을 뿐인데 지난날이 꿈같기만 하구나. 어느새 세상일도 스스로도 궁금하지 않고, 다가오는 계절이 전하는 말에 조용히 귀기울일 따름이다.
어제 큰아이의 신병 교육훈련 수료식이 있었다. 어느 때보다 훌쩍 커 버린 모습을 보며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아비의 시린 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제복들의 의젓한 모습이 파란 하늘, 시퍼런 바다를 닮았더라. 사진은 0124님의 아이폰 13 미니.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중에도 며칠 부쩍 가을 냄새가 난다. 계절은 돌고, 우리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간 세일러 프로피트 캐주얼 M닙과 워터맨 까렌 F닙, 노트 몇 권과 잉크 몇 병, 펜 케이스를 추가하였다. 오랜만에 책도 몇 권 샀다. 무념, 응진 역의 법구경 이야기, 리처드 바크의 환상,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민병일의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당분간 뭘 더 들일 일은 없을 것 같고 기념사진 한 장 남겨 둔다. 이 세계가 즐겁다.

펜을 갖고 놀며 이것저것 써보다 여러 번 필사하게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하도 이뻐 옮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며칠 사이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 잉크와 미도리 페이퍼 패드, 고쿠요 노트 패드를 추가하였고, 몇 가지 만년필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년필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이웃한 필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모처럼 내가 가진 라이카 카메라와 렌즈들 근황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렌즈야 그렇다치고 카메라 시세가 너무 올라 깜짝 놀랐다. M6 복각판이 나왔다는 소식도 처음 알았다. 만년필은 꾸준히 새 제품이 나오고 있고 필름 카메라도 새로 나오는 마당에 몇 년째 냉동실에 잠자는 필름도 한번 깨워보나 어쩌나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가격의 기계를 들고 엉터리를 찍게 되겠구나. 아날로그와 아마추어에게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