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세상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안다. 카메라 본체보다는 렌즈가, 렌즈보다는 필름이 결과물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찍는 사람이나 현상, 인화 과정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나 렌즈보다 후처리 과정이 결과물에 훨씬 크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후처리 작업이나 필름 등에 신경을 쓰기보다 렌즈나 카메라를 살펴보고 구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짧게나마 만년필의 세계에 들어와 노닐다 보니 생각난 얘기다. 만년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필감과 결과물일 텐데 역시 펜보다 잉크가, 잉크보다 종이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취미 생활이란 게 그것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장비나 도구를 살펴보고 고르고 지르는 재미를 빼놓고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능을 떠나 관상을 목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으니.

여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여행의 즐거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등산 장비를 고르고 등산 코스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과정이 모두 등산 생활인 것처럼, 만년필 세상도 구석구석 살펴보고 노는 재미가 있다. 정착이 어려운 세상이다. 펜도 그렇지만 잉크와 종이에 이르면 어마어마하다.

0124님에게 맛을 보라고 카웨코 클래식 스포츠 EF닙(뽑기 잘못으로 M닙 추가 구매)과 여러 잉크 카트리지들, 사무실에서 쓰려고 파이롯트 라이티브 F닙과 카트리지, 컨버터를 샀고, 파이롯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구매대행으로 커스텀 헤리티지 912 FM닙을 주문하였다. 잉크는 이로시주쿠 월야, 송로, 산밤, 죽림, 그리고 디아민 이클립스를 추가하였고, 우공공방의 원목 트레이와 양지사의 디루소 메모 패드 리필용 여러 권을 구입하였다.

사진기를 만지거나 물생활을 할 때도 그랬듯이 큰 세상 앞에서는 기가 죽어 딱 괜찮은 보급기나 중급기 기준에서 만족하고 나름 즐길 걸 안다. 타고난 소심함과 옹졸함이 어디 가겠나. 더 대형이나 고급으로는 가지 않는 저항선이 있다. 지를 건 어서 지르고 천천히 즐기면서 새 세상을 누리리라.

다음은 필사하다 다시 만난 고형렬의 시 ‘중’ 전문.

어떤 시인도 나에게 콤플렉스는 아니다
나의 콤플렉스는 오직 이들뿐이다
소 똥과 오줌으로 약을 삼으며
남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로 옷 해입고
똥막대기에 해골을 꿰 어깨에 메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자가 못되더라도
나무 안경을 쓰고 어느 산골에
오직 경 하나와 옷 한벌로 세상을 보고
가만히 살아가는 겨울산과 같은
중, 그 중이 왜 이렇게 부럽게 되었는가
오, 중이여 막대기 하나와 옷 한벌과
신발 한짝 모자 하나로 떠돌거나
한 방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중이여
육식을 하지 않으며 산속에 살고
바람 속에 잠이 드는 저 불굴의 중이여
내 생은 내 육신 속에서 죽어가
이젠 영영 다다를 수 없는 길이 되었는가
어떤 사랑도 꽃도 나의 적은 아니었다

* 타이핑 된 걸 필사하는 건 좋은데, 이 포스팅처럼 적은 걸 자판으로 두드리자니 예전처럼 즐겁지 않구나. 아날로그 만세.

어떤 세계

지난 삶을 생각하니 기억의 총량을 벗어날 수 없구나. 남은 기억이 지난 삶의 전부로다. 언젠가부터 더해지는 기억은 없고 잊혀지거나 지워지는 기억만 있다. 용서해 다오. 모자란 놈이 모질진 않았으나 미덥지도 않았겠다. 며칠 전에 보니 배롱나무 꽃이 피었더라. 죽으면 새로운 세계로 드니 설렌다는 사람도 있다더만. 모를 일이다.

근래 만년필로 글씨 쓰는 재미에 빠져 있다. 내가 가졌거나 가진 가장 격렬한 취미라면 걷기나 등산이겠고, 매양 잔잔한 재미에만 빠졌거나 빠져 있는데 고요한 것 하나 더하게 되었다. 우선 구입한 건 펠리칸 M215 F닙과 4001 블루 블랙 잉크, 클레르퐁텐, 미도리, 로디아 노트와 밀크 프리미엄 복사용지, 그리고 펜코 클립보드. 반야심경과 몇 편의 시, 도덕경과 장자의 어떤 구절들, 그리고 읽고 있는 책과 블로그에 인용하거나 끄적인 글들의 일부를 필사하였고, 글을 쓰는 이상의 매력에 빠졌다. 사각거리며 미끄러지고 맺혔다 마르는, 펜과 잉크와 종이의 변주, 그 세계에.

올 장마는 유독 길고 자주 많은 비를 뿌리는구나. 살아갈 뿐 기억하지 못하는 중생에게 기어이 기억의 습한 길을 안내하는 듯이.

늙은호박

지난해 구월 금호에서 얻은 한아름짜리 늙은호박, 있는 듯 없는 듯 주방 한 구석에서 오래 묵었다. 아무래도 상했지,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사 잘라본다. 상하긴 개뿔. 주황색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단한 두께 안이 불을 켠 듯 환하다. 노을보다 붉게 빛난다. 전도 부치고 범벅도 만들어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구수한 늙은 맛이 난다. 너처럼, 안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두께를 가져야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활활 타오르는 속을 갖고, 한결같이 잘 여물어야겠다. 속이 더 붉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낙화

추억이 서린 음악은 얼마나 위험한가. 나이가 들어도 마르지 않는 심장, 바닥으로 꺼지거나 허공으로 사라질 아득함이여. 한잔의 술은 얼마나 불온한가. 거짓 위안과 환상으로, 가는 이를 배웅하는구나. 저 꽃잎은 얼마나 위태한가. 다음 계절이 와도 다시 돋을 줄 모른다. 부질없는 낭만과 뜻한 바 비겁으로 일관한 생애, 비와 마지막 바람을 불러 치명을 완수한다.

언제나

그래, 언제나 때를 기다렸지. 과거로 가거나 미래를 추억하고, 길을 접어 주머니에 넣을 적이나, 문득 누군가를 만나고, 흐리거나 비가 내리고, 헤매다 다시 길을 낼 적에도. 때가 되면 알지. 멱살 잡은 건 언제나 내가 아니라 때라는 걸. 그래, 너도 오래 기다렸구나. 먼저 움직이지 않는 세월처럼, 언제나 그렇게.

길을 걷다 보았다. 거기 있던 너. 지나지 않은 지난날.

잔을 비우며

두 병에서 세 병으로 가는 그 어디쯤
두고 온 사랑이 있을까
까무룩 잃어버린 꿈이 있을까
그 어디쯤
어린 날 그 어디쯤 가는 길이 있을까

사월을 보내며

사월을 보내며
사월에 보낸 그 사람을 생각한다
청춘의 몇 년을
나와 함께 보낸 사람
사월을 보내며
함께 사월을 보낸 그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무대

막이 오르면, (배경)눈 덮인 산하. (배경 음악)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1곡 안녕히 /Gute Nacht, 바리톤. (잠시 후, 독백)누구나 가야 하는 길, 인생은 슬픈 것이로구나. (억겁의 길을 걷는 나그네, 이어지는 독백)잘 있으라, 모두들. (노래 소리 높아지다 곧 암전)침묵 후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나그네는 사라지고, 눈 덮인 산하에 내리는 눈. (배경 음악)20곡 이정표 /Der Wegweiser에 이어 24곡 거리의 악사 /Der Leiermann. (독백)인생은 슬픈 것이로구나, 누구나 가야 하는 길. (천천히 막이 내리며, 이어지는 독백)그대, 잘 가오.

걸어라

울적하거든 걸어라
삶이 속이는 것 같거나
세월이 야속하여도
산길이든 들길이든
꿈길이든
살 만하거든 걸어라
딱 죽고만 싶거나
대개 부질없어도
인연이야 모를 일
저 세상 일일랑 잊고
다시 걸어라

마지막 계절

토요일 저녁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 최백호 콘서트에 다녀왔다. 한 주 내내 비가 내리더니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에 또 비가 내렸다. 공연의 감흥에 비까지 내리니 날씨 핑계로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사계동행 산행 일정을 뒤로 미루고 이십여 일만에 한잔하였다. 대봉동 징기스와 퍼센트. 창밖 풍경에 가라앉았다 자정 너머 돌아올 때까지 내내 비가 내렸다.

나이가 들고 긴장을 즐기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말과 마지막 계절이 가을이었으면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일 뿐 한 호흡에 부르기 어려우면 세 호흡에 부르면 된다고, 아흔에도 콘서트를 할 거란다. 그때 부를 마지막 계절이라는 노래도 만들어 두었다며 조금 들려주었다. 멋있게 잘 늙었다는 생각을 하며 멋있게 잘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람이 산다는 게 무얼까 잠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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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바람에

겸손하고 염치를 알며 약간의 위악에 위트와 직관을 겸비하고 있다면 더불어 놀 만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배려하며 예술을 논하고 세상을 희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살다 보면 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해가 되기도 하고 해가 되던 것들이 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답이 되지 않는 것들이 답이 되기도 하고 답이 되던 것들이 답이 되지 않기도 한다. 뻔한 정답이나 어려운 해답도, 이해나 손해도 다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 나지 않는 것이 절반, 쓰잘데기 없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구나. 이제 지난날은 그저 다 지나간 것일까. 지날 날도 그저 그렇게 지나가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이제 그러면 안 되는 것일까.

산에 올라, 너를 생각하며 울었다. 너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울고,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며 마저 울었다. 짧은 바람에, 마른 가지가 저 혼자 떨어졌다.

흔들흔들

인생이 늘 알 듯 모를 듯하더니 언젠가부터 어제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알 듯하던 것이 무언지도 영 모르겠다. 당최 현실감이 없고 이게 나인지 여기가 내가 사는 세상인지도 확실치 않을 때가 있다. 어쨌거나. 지난번에 눈이 꽤 왔나 보다. 오를 때 멀리 드문드문 보이던 것이 하산길 응달에는 온통 하얗게 굳어 빙판을 이루고 있었다. 뭘 좀 생각하다가는 변을 당하기 십상이겠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와 산 아래를 빙 돌았다. 어디든 바로 가기 싫어 더 멀리 돌았다. 지치면 주저앉을까. 앞발로 뒷발을 끌고 뒤꿈치로 땅을 밀었다. 가 버릇하면 또 간다고, 엎어질 듯이 자빠질 듯이 흔들흔들 걸었다. 그렇지. 늘 알 듯 모를 듯하던 것은 알든 모르든 별 게 아닌 거였다. 대저 내가 흔들거나 흔들린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