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준비

반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 남은 날들 중에 지금이 가장 좋을 때요, 이제 가장 좋을 날들만 순차적으로 남은 셈이다. 쇠약해 가는 육신을 따라 어쩌면 생각은 조금 여물고 마음은 덜 부대낄지 모르겠다만.

휴일 아침,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화양연화를 다시 보았다. 잠시 비밀을 봉했던 진흙이 풀리고 풀씨와 꽃씨 같은 것들이 날아다녔다. 누구에게나 벼르던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잠시 담배 한 대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 ‘먼지 쌓인 유리창’은 아랑곳없이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거기나 여기나 시간과 기억이 헝클어지기는 매한가지, 누구나 그 정도는 알고 있다.

* 제목은 작중 양조위의 대사 ‘나 좀 도와줄래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요’에서 따온 것. 이별 연습으로 유명했던.

권주가

며칠 흐리고 비가 내렸다. 봄은, 봄이 오기 전은 언제나 사계절이 섞여 어제는 초여름이었다가 오늘은 초겨울이 되기도 하였다.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젊음이었고 못 견디게 사무친 것은 네 눈빛이 아니라 피안의 손짓이었다. 바람이 불어 한겨울이더니 바람이 불어 봄이로구나. 내가 그리워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절이었고, 네가 아니라 나였다. 만개했던 매화 꽃잎이 비에 젖어 구겨진 채 바람에 날린다. 이 봄에는 꼭 꽃구경도 하란다. 산에 올라 진달래도 보고 꽃길도 걸으란다. 가고 오지 않음만 일일까. 잔도 없이 찬도 없이 무어라 무어라 자꾸만 권주가를 부른다.

봄꽃

부질없는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봄, 너는
불꽃이로구나.
부질없는 것을
부질없게 만드는
너는 불꽃이로구나.

어떤 소식

많은 일들이 그렇듯 좋은 줄 몰랐던 그때가 좋았다. 돌아보면 지금도 그때가 될 것이지만 더는 젊지 않으니 어쩌랴. 마른 봄이 오는 길목에서 송창식의 잊읍시다를 느리게 느리게 불러 본다. ‘간밤 꾸었던 슬픈 꿈일랑 아침 햇살에 어둠 가시듯 잊어버리고, 함께 피웠던 모닥불도 함께 쌓았던 모래성도 없던 일로 해 두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조심조심 아주 조금씩 다시 찾자고’ 천천히 천천히 불러 본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표가 난다. 잘 감출수록 잘 드러나는 법, 가는 겨울도 슬픔을 아는 것인가. 터지는 매화 꽃망울이 너를 닮았다.

단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들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싱글 몰트와 함께한다. 생계는 아름다우나 인생은 슬픈 것. 황금의 물결을 따라 나비떼가 난다. 이나무, 팽나무, 좀작살나무. 바닥 없는 곳으로부터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여럿 가운데 하나여도 좋아라. 그래, 아끼기 힘든 것이 어찌 너만이랴. 아낌 없는 마음도, 아끼는 마음도 좋아라. 이 절기에 핑계가 더 필요할까. 다만 잔을 들어 가고 오는 일을 기릴 뿐.

올해도 바싹 마른 봄이 오려나, 유난히 겨울 가뭄이 길다. 그해 가을 같은 날이 올까. 오래된 나무 향에 취해 나무가 꾸는 꿈이 되었다가, 낯선 꿈이 슬퍼 오늘은 오래 울었다.

어느 저녁

술이 고픈 저녁, 그림자처럼 길게 몸을 끌며 지나간 이들을 생각한다. 바람이 분다. 겨울 칼바람도 느린 걸음을 재촉하지 못하고 하나둘 불을 켜는 가게들을 위협할 따름이다. 지나간 일들이 지나간 이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다만 술이 고픈 저녁, 겨울 해는 짧아 어째 설움이 긴 것인가. 오늘 마시지 못할손 다시 마시지 못할까마는, 부질없이 마음은 바쁘고 걸음은 더욱 느리다. 지난날처럼 아무데고 혼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지도, 다 늦은 시간에 누구를 부르지도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지나간 이들과 지나간 길을 길게 걷다 보면 마치 여러 사람과 번갈아 술잔을 주고받은 것처럼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도 한다. 가장 먼 길을 가장 길게 걷다 보면 고픈 술을 달래고 지난날처럼 훗날을 기약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쯤이면 길 끝에서 다시 바람이 불고, 시린 눈에는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저녁이 곱게 저문다.

지난날처럼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자리가 있고, 아무리 버텨도 취하는 자리가 있다. 역사는 술이 덜 깼을 때 일어나는 법. 오늘처럼 내일도 평온하리니, 누군가를 기다리다 만난다는 건 젊음처럼 분에 넘치는 일이어라. 누군들 다른 삶을 꿈꾸지 않으리오마는, 낭만이라는 게 있던 시절에도 누구나 낭만적으로 살 수는 없었지. 술잔도 그대 따라 저무네. 새로울 일 없어라. 꿈도 취기요, 취기도 다른 꿈이었을 뿐. 지난날처럼 기꺼이 한 잔 보태노니, 한 점, 한 곡에 또 한 세월 가누나.

보고 싶은 얼굴

어쩌다 보니 담배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꼬박 일 년이 지났다. 끊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라 그저 한번 안 피워 보자 했던 것이 그렇게 되었다. 아직 책상 서랍에는 뜯지 않은 담배 두 갑과 일회용 라이터가 있다. 술은 지금도 가급적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대체로 절반 정도 성공한 것 같다. 횟수는 줄고 먹을 때 양은 오히려 늘었달까. 생각해 보면 몸 상태를 따라가는 것이니 기실 바뀐 게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만.

며칠 넷플릭스에서 인간실격을 몰아 보았다. 자의식 과잉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저씨 이후 모처럼 드라마 속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보는 내내 끝까지 다 보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지 생각하였다. 이제 이 세계가 낯선 걸 보면 거기서 긴 세월을 보낸 게 틀림없다. ‘붉은 꽃그늘 아래서 꽃인 양 부풀었던, 남겨진 혼잣말’들에 복 있을진저. 할렐루야.

* 인간의 자격 /화의 나라 /투명인간 /사람 친구 /이름 없는 고통 /아는 여자 /Broken Hallelujah /다윗과 밧세바 /세 사람 /제자리 /금지된 마음 /유실물 /모르는 사람들 /인간실격 /마침표 /별이 빛나는 한낮

청춘

세상에는 멀거나 가까운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어중간하거나 적당한 것도 있는 거지. 불현듯 겨울이 찾아온 시월 중순, 스산한 마음에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한가득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과 주인을 찾지 못한 말들이 거기 있었구나. 술 한 모금에 기억 한 자락씩 흘려보낸다. 남은 기억이 얼마일까. 찬바람에 손을 내밀다 뭉툭하게 끝이 잘렸다. 잠은 줄고 졸음이 늘었다. 부질없이 가는 게 있을까. 떠난 자리는 비는 것인가. 짧은 가을, 가는 세월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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