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게 장땡

펜을 갖고 놀며 이것저것 써보다 여러 번 필사하게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하도 이뻐 옮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며칠 사이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 잉크와 미도리 페이퍼 패드, 고쿠요 노트 패드를 추가하였고, 몇 가지 만년필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년필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이웃한 필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모처럼 내가 가진 라이카 카메라와 렌즈들 근황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렌즈야 그렇다치고 카메라 시세가 너무 올라 깜짝 놀랐다. M6 복각판이 나왔다는 소식도 처음 알았다. 만년필은 꾸준히 새 제품이 나오고 있고 필름 카메라도 새로 나오는 마당에 몇 년째 냉동실에 잠자는 필름도 한번 깨워보나 어쩌나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가격의 기계를 들고 엉터리를 찍게 되겠구나. 아날로그와 아마추어에게 영광을.

M6 서른두 번째 롤

첫 번째 사진을 보니 지지난해 가을부터 들어있던 필름이로구나. 잔인한 봄은 또다시 찾아오고, 한 세월은 가볍게 무너진다. 지나가는 것들아, 더는 돌아보지 마라.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summicron 50mm 3rd, 코닥 컬러플러스200

M6 서른한 번째 롤

첫 번째 사진을 가만 보니 지난해 아버지 생신 축하연 때 찍은 것이다. 필름을 넣어둔 지 오래되긴 하였으려니 하였지만 오늘 찍은 마지막 사진까지 꼬박 일 년이 넘었을 줄은 몰랐다. 냉장고에 있는 필름들도 거진 유효기한이 지났거나 얼마 남지 않았겠다. 오랫동안 M6과 D50을 처분하고 후지 X100으로 갈아탈 생각을 하였으면서도 출시 이후에는 막상 저지르게 되질 않더니 불쑥 다시 불이 붙기도 한다. 그래봤자 술 마실 일도 아닌데 실행할 턱이 없겠지만 말이다. 에어컨도 그렇고 컴퓨터도 그렇고 여러 날 알아보고 재어보고도 어째 마지막 한 걸음이 떼어지지가 않는다. 무기력이 천성처럼 내려앉은 것일까. 그러고 보니 부질없는 것은 매한가지로되 덕을 보는 놈은 다 따로 있는 것이로구나.

서연이가 그만두었던 바둑을 다시 시작하였다. 지역 연구생 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여러모로 인연이 닿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얼마나 계속할는지 알 수 없으나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을 터이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summicron 50mm 3rd, 후지 오토오토400

M6 서른 번째 롤

나나 내 가족 또는 나와 가까운 사람이 그 같은 상황에 처할 경우나 가능성에 대한 고려, 적어도 그 정도의 분별력을 갖는 것이 세상일을 꾸미거나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자신의 안위를 바탕으로 쉽게 타인의 삶이나 병리적 현상들을 재단하는 사람들과 세태가 갈수록 두렵다. 망가져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새삼 ‘거대한 기획’이 절실함을 느낀다. 설령 아무것도 멈추거나 바꿀 수 없을지라도 어떤 커다란 기획을 염두에 두고 모색하고 저지르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뭣하면 쭈그리고 앉아 비명이라도 지르고 꼬부라진 혀로 주정이라도 부릴 일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렇게라도 꿈틀, 살아야 하는 것을.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summicron 50mm 3rd, 코닥 컬러플러스200

M6 스물아홉 번째 롤

ISO 100짜릴 갖고 어두운 실내에서 용케 찍혔다 싶다. 롯데시네마에서 서연이와 0124님은 맘마미아를, 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본 날부터(오래되긴 했나 보다. 벼랑 위의 포뇨를 함께 본 날인 줄 알았더니, 핀잔 듣고 수정했다. 포뇨 본 날 갔다는 와인 앤 스피릿은 더욱 기억이 없었다. 잭콕까지 먹어 놓고는) 어제, 봄날 같았던 휴일 한낮까지. 그 사이 어느 밤에는 혼자 적벽대전 1, 2를 달아서 보았고, 다시 홍어 삼합과 오징어 통찜의 내장에 맛을 들여 틈나면 순례하고 있으며, 생업은 바빴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다. 책과 음악은 멀리하였으며, 두 주째 토요일 오후에는 이 치료하는 서연이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손아귀의 힘을 느낄 때마다 아비의 심정으로 늙어간다. 늙기는 하는데 여덟 점으로 내려앉은 녀석의 바둑을 닮아 그런지 어째 전체 판을 읽는 수는 줄어만 간다. 독사에게 발목을 내미는 어린 왕자의 시린 마음이 그립기도 한 것이다. 이 새벽, 어느 별에서는 피지 않은 꽃망울이 지고, 어느 별은 궤도를 슬쩍 틀어 전부를 바꾸고야 만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미쯔비시 수퍼mx100

M6 스물여덟 번째 롤

제 자식 얼굴과 몸짓이 담겨 있어 더욱 그럴 테지만, 스캔한 걸 처음 모니터로 볼 때는 이번에도 그럴듯한 사진이 하나도 없구나 하다가도, 막상 올리려고 한 장 한 장 뺄 때엔 열두 번도 더 고민하게 된다. 삶에서도 무언가를 하나하나 덜어내는 기분일 때가 있다. 비어야 채운다지만, 어설픈 비유일 뿐이고, 채우고 싶은 욕심일 뿐이다. 그나마 사진을 고르듯 골라서 덜어내는 것이면 나으련만, 안 그래도 앙상한 마음들이 파르르 떨릴 때가 있다. 무릇 밀려나는 가슴이야 밀어내던 가슴을 헤아릴 길 없는 법, 문득 그렇게 지나간 사진들이 밟힌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포트라160vc

M6 스물일곱 번째 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 시골 외가에 다녀왔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이제는 빈집을 막내 외삼촌이 텃밭 가꿔 가끔 들르시는 곳이다. 어린 시절 기억이 많은데다 무척 오랜만이라 가기로 한 열흘쯤 전부터 괜스레 설레고 들뜨곤 했다. 마을도 집도 바뀐 데가 많아 그 시절 같지 않았지만, 늘 그랬듯, 곳곳에 지나간 자국들이 도사리고 있다 튀어나오곤 했다.

서연이 녀석은 하루 전 금요일 유치원에서 고구마밭 체험 행사를 갔다 왔는데, 이번엔 1박2일 시골 체험이라 일러두었더니, 주워섬기기를, 호박 따기 체험, 고추 따기 체험, 땅콩 캐기 체험, 잠자리 잡기 체험, 많이 먹기 체험, 어쩌고 해가며 기대한 대로 마음껏 뛰고 신나게 놀았다. 이웃 친척 어른 집에 일찍 어머니를 여읜 일곱 살 민식이가(서연이에게는 아저씨뻘이다. 마을에 아이라고는 혼자밖에 없어 애처로웠다) 좋은 동무가 되어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것저것 녀석 깊은 곳에 스민 게 많았으리라.

해질 무렵의 순간적인 정적과 긴 산그늘, 그 서늘한 기운, 그리고 겨울 해처럼 가늘고 따사로운 아침 햇볕은 나기도 전에 있었던 어떤 기억을 다시 깨운 듯 낯설지만 낯익은 것이었다. 하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운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을 잊게 하고 일상을 멈추게도 했다. 돌아왔을 때는 다른 세상에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가슴 밑바닥부터 시리고 서늘하던 그 기운, 일찍 불 꺼진 집집처럼 삭고 소멸하는 것이 애가 저리더니, 며칠 또는 평생 그게 반복되다보면 죽음도 이별도 대수롭잖게 여기게 될까 하는. 죽음도 이별도 애초에 대수롭잖은 게 아닐까 하는.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프로이미지100

M6 스물여섯 번째 롤

근 석 달 열흘 만에 M6에 필름을 넣어보았다. 지난 금요일 앞산에 바람 쐬러 갔을 때, 그리고 다음 날 신천에서. 더위도 더위였고 맨날 똑같은 사진만 찍는 것 같아 좀 다른 걸 찍어보자 하던 것이, 맴맴 그 자리다.

신천에 간 날, 중동교 계단을 내려 신천으로 들어서자마자 방송국에서 접근해와 서연이를 잠깐 촬영하고 인터뷰한 게 오늘 저녁 대구MBC ‘생방송 전국시대’에 방영되었다(내 뒤통수와 한쪽 어깨도 잠깐 찬조 출연하였다). 6미리로 스케치만 하듯 한 거라 나오기나 할까 했던 것이 내 눈으로 보기엔 썩 잘 나왔다. 사는 동네와 함께 이름까지 자막으로 떠 더 그럴듯해 보였다. 녀석의 말은 딱 한 마디, 물고기가 땅 위에 있는 게 신기해요.

* Leica M6, summicron 50mm 3rd, 코닥 포트라160vc

M6 스물다섯 번째 롤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저 먼저 흘러가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때때로 그 시간을 좇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이 시간도 저대로 흘러가고 만다. 아무려나. 우연찮게 손에 들어온 유효기간 일년 지난 필름, 마지막 한 장 찍고 나서 벤치에 앉아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초록이 대세였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골드100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