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일

지난 일요일, 율이 태어난 지 오십일 되던 날, 산부인과 병원과 연계한 스튜디오에서 내준 무료 쿠폰으로 오십일 사진을 찍으러 가서 율이 이모가 눈치 보며 찍은 사진. 뽀샤시하게 그려놓은 스튜디오 사진보다 맘에 든다. 그날 십몇 년 사귄 후배 석주, 현정의 결혼식이 우방타워 1층에서 있어 서연이와 나는 랜드와 타워를 오가며 여름 같은 뙤약볕 아래 가는 봄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필우, 여전한 모습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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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스산한 봄이로고. 약속도 다짐도 없이 찾아온 고단한 봄이로고. 모눈에 갇힌 다족류 모양 갈 곳 잃은 봄이로고. 기대면 푸석푸석 마른 먼지 날리고야 마는 사랑하는 봄이로고.

직선은 왜 직선인가. 어떤 연유로 곧게 뻗어 너와 나를 나누고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가. 무수한 너를 관통하여 한 줄에 꿰기도 하고 때로는 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가. 오랜 수직의 꿈을 어찌 다시 찾지 않는가.

지난날, 다시 지날 수 없는 날이 그리워 목매단 한 떨기 푸른 자국.

사랑니

어제 예정에 없던 사랑니를 뽑았다. 오른쪽 아랫잇몸 수술 도중 앞쪽 어금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라며 뽑은 것인데, 지금껏 그로 인한 어떤 증상도 없었던 데다 잇몸 아래 숨겨져 있어 나로서는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유일한)사랑니여서였을까. 그간 존재조차 몰라서였을까. 처방전을 들고 치과를 나와 약국으로 가는 동안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매주 한 시간 안팎을 의사나 간호사 앞에 입을 딱 벌리고 누워 좋지 않은 속을 드러내고 있다 보면 일종의 자기 모멸감 내지는 자기 연민에 젖어들곤 하는데, 이날은 특별히 더 뭔가 위안이 필요한 기분이었다.

중앙통 거리는 발랄하고 흥겨웠다. 새치름한 날씨에 제 모양을 잃고 우중충히 돌아앉은 봄꽃들과 달리 거리의 여인들은 날씨 따위 아랑곳없이 통통 튀었다. 위안거리 삼아 뭐라도 지를 품새로 가까운 백화점엘 들러 에스컬레이터로 맨 위층까지 올랐다가는 그냥 내려왔다. 그리고는 술 먹은 다음날이면 자주 사먹곤 하던(술을 먹지 않고부터는 생각나지도 않던) 수제 햄버거 가게에서 거즈를 앙다문 입으로 점원과 가벼운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햄버거와 샐러드를 포장해 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을 훌쩍 넘겨 돌아다니다 온 것이었다. 마취가 풀리며 진료 시작 후 신경치료 이래 가장 큰 통증과 연민이 시작되고 있었다.

밀명

사십여 일 술도 담배도 멀리 하였다. 반가운 얼굴들, 어쩔 수 없는 자리, 돌아온 봄을 핑계로 서너 차례 많고 적게 마시고 피웠으나, 열흘 가량은 참말 딱 잊고 지냈다. 욕망이 거세된 듯 거짓말처럼 조금도 생각나지 않고 주변의 유혹도 방해도 없었다. 매주 꼬박꼬박 기약 없이 이어지는 치과 진료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사는 모양이 제법 달라지기도 한 것이다.

어제오늘 집 앞 도로변에 피기 시작한 벚꽃이며 오며가며 남의 집에 핀 소담한 목련을 보고도 무심키만 하더니, 한낮 봄바람에 실려 멀리 그늘진 옹벽에 샛노랗게 핀 개나리 한 무리를 보고는 꽃을 두고도 한잔 술을 떠올리지 못하는 생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였다. 부질없는 고집과 날리는 꽃잎보다 가벼운 사람살이며, 오가는 계절과 가고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였다. 무릇 진통 없는 생산이야 없을 터, 비로소 너와 나는 이렇게 근접하는 것인가, 슬픈 밀명에 울기도 하였다.

슈퍼마리오

사라지는 해를 잡으려 부러진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였다. 봄이 오다만 길목, 지워진 메아리가 울고 있었다. 절정의 순간을 미루거나 지나친 흔적들이 거기, 살고 있었다. 어차피 눈 한번 돌리는 대로 재구성되는 세상이었거니, 한 꺼풀 벗겨낸 자리엔 색색이 셀로판지 모양 예쁜 꽃이 피었다. 후미진 술집 낡은 모니터에선, 후욱, 썩은 입김을 타고 멜빵바지, 화면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용히 구겨져 나발이나 불고 더 낮게 욕이라도 웅얼거릴 때가 좋았지, 상마다 곱게 얹힌 검은 머릴 신나게 퉁겨 오르고 있었다. 봄이 돌아간 길목, 그렇게 버려진 꿈들이 버섯보다 거대하게 부풀고 있었다.

봄, 그러나

어제 왼 주문. 어찌 이만한 행사에 한잔 술이 없으랴. 결속과 이별이 곱게 내려앉는 봄, 삼백 년 하고도 석 달 열흘 만의 술에 한 개비 궐련이 또한 없으랴.

다음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 늘 맹세를 지킬 수는 없는 법이다. 때로는 의지가 약해서, 때로는 우리가 고려하지 못했던 어떤 우월한 힘 때문에.

* 지난달, 무려 0.049% 확률의 카드사 경품 응모에 당첨되었다. 애플의 아이팟 터치 2세대. 제세공과금 22%를 물고 손에 쥔 행운, 잠시 만져보곤 왜 ‘애플’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서율

온종일 단비 내린 하루, 첫째처럼 예정일을 딱 맞추진 않았지만, 같은 일요일, 3,680그램의 몸무게로 큰 진통 없이 세상에 나왔다. 풀 抒에 붓 聿, 녀석을 부를 이름이다.

Old Partner

두 주째 토요일마다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스물다섯 군 복무 때 어이없이 다친 앞니 두 개와 잘못된 생활 습관이 오늘에 이르게 하였을 것이다. 루시드 폴의 음성을 가진, 드물게 신뢰할 만한 스타일의 젊은 담당 의사는 육 개월, 또는 그 이상의 치료 전망을 내놓았다. 지난주엔 공들인 치석 제거, 이번 주엔 발치 세 개. 0124님 동료들 보기에도 그렇고, 폴의 부름에 나 역시 신뢰로 적극 응답할 작정이다.

지난주 진료 후엔 워낭소리를 보았다. 소가 나오고 농촌 풍경이 주로 보일 모양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티켓에 찍힌 ‘Old Partner’에 눈길이 가더니, 보는 내내 그 영문 제목이 따라다녔다. 어린 시절 시골 사람들과 풍경도 내내 함께 하였다. 가장 좋았던 지점은 단 한 번 노인이 제 몫을 벗어나는 오랜 파트너의 면상을 모질게 후려치는 장면이었다. 그 한 장면으로 모든 리얼리티가 살고 다큐멘터리는 완성되는 듯 보였다. 어릴 적 시골 풍경도 온전히 되살아나는 듯 했다. 최근 6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는데 반가운 일면 남이 하는 걸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 동네 풍토엔 역시 살짝 질리기도 한다. 서편제를 본 그 많은 사람들은 보고난 후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문득 다시 궁금하다.

돌이켜보면 특정한 이념이나 사람, 드물게 생업에 연관된 어떤 것들이 삶을 꾸리는 데 중요한 변수가 되었으나, 그 중심엔 늘 술이 있었던 듯. 언젠가부터 그걸 축으로 전체 얼개도 짜고 일정도 잡았다. 과음과 폭음을 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절제된 삶, 그게 가져다 줄 세상이 짐짓 두렵기만 하다. 꼬박 스물세 해 이어온 녀석들, 한 녀석은 영영 멀어질지도 모르겠다만, 다시 만났을 때 놀라거나 놀리지는 말아다오. 내가 어떻게 사랑하고 너에게만은 최선을 다했는지 잘 알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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