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톨스토이의 부활. 먹을 술 다 먹고, 공상할 것 다 하고, 아이에게 치이며, 습관대로 이 책 저 책 집적거리다 보니 첫 장을 넘기고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한참 걸렸다. 나중에는 네흘류도프와 떨어지기 싫어 일부러 그러나 싶을 만큼. 죽음의 한 연구 이후, 모처럼 화두를 붙들 듯 즐거움과 괴로움을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다. 딴에는 쫓기듯 읽은 게 그렇다. 어찌 진작 읽지 못했을꼬. 만나고 보면, 다 때가 되어 만난 것이겠지만. (때가 되지 않으면 만나도 만난 줄을 모르니, 헤어져도 헤어진 줄 모르기도 하는가.)

100년도 더 된 책에 최근의 그럴듯한 담론을 뛰어넘는 전언들이 가득하였다. 사소한 비유에 이르기까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며, 어느 때고 냉정을 잃지 않고, 특히 인간과 관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흐트러짐 없는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읽다 보면 그때의 러시아로부터 한 치도 나을 것 없는 세상과 인민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거장의 웅혼한 세계와 숨결도, 거인의 꼿꼿한 자태도. 오래전 읽어 조심스럽긴 하나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한두 갑절은 윗길인 듯.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의 갑작스런 전향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장은 떨떠름하였다. 책장을 덮으며, 옮길만한 대목을 표시하려 붙여놓은 포스트잇(책을 읽으며 이런 걸 붙여보긴 처음이다) 몇 장은 그냥 떼어냈다. 이래저래 부질없는 짓이 아닐 수 없으므로.

* 쪼그라든 심장만 달랑, 허공에 매어달린 느낌을 아는가. 기다리던 신형철의 책이 나왔다. 몰락의 에티카. 함께 주문한 책은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과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바로 전에 사다놓은 박이문의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서점에 가서 살폈으면 이 책을 샀을까. 대체로 글은 좋고 일종의 정보도 얻었으나, 터무니없는 책값까지, 어이없었다), 이청준의 신화의 시대, 그리고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까지, 읽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 어쨌든 세상과 막막한 관계, 거리에 대한 위안거리는 장만한 것. 가보는 거다.

폭풍

연이틀 폭풍이 몰아쳤다. 난데없는 계시처럼 두드려 맞았다. 가슴 아랜 천길 낭떠러진데 짓누르는 힘은 천근이 넘었다. 막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마음이 이럴까. 그렇게 짓밟힌 마음이 이럴까. 나무도 새도 꽃도 세상도 미동도 않는데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하려니 외롭고 괴로웠다. 點心으로 월배까지 가 메기매운탕 한 그릇 먹고 나서야, 뜨거운 국물에 보드라운 속살을 뜯어먹고 나서야, 희멀겋고 넓적한 머리통, 그 길게 벌어진 주둥일 마주하고 나서야, 겨우 숙취를 즐기듯 여진을 즐길 수 있었다. 그제야 폭풍이요 계시인 줄 알았다. 매뉴얼 없이 해체 후 재조립한 것 마냥 여기저기 덜거덕거리긴 하지만 그예 형태는 갖추었다. 그나저나 그저 흘러가게 두면 좋으련만, 아무것도 아닌 인생, 그물에도 걸리는 바람처럼 여태 갈 곳 모르겠다. 아무려나, 짙은 피를 줄 터이니, 알았으니, 그만 튼튼한 심장을 다오.

첫눈 온 날 아침

첫눈 온 날, 그저께 아침, 전혀 생각 못하고 있다가 쏟아지는 눈발에 일없이 설레고 반가웠다. 서연이는 나무마다 꽃이 핀다고 좋아하였다. 저녁에는 올 첫 송년회 자리, 무어 그리 보낼 게 많고 아쉬울 게 있다고, 내친 김에 사차까지 내달렸더니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온다. 누적된 알코올 때문이겠지, 요즘 몸뿐만 아니라 부쩍 정신도 마음도 약해졌다. 다음은 0124님의 전언.

급하게 손톱 끝 봉숭아물을 확인하고
아직도 남은 봉숭아물에 흐뭇해하는

과연 너의 첫사랑 이루어질까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우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이병률의 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전문. 이제야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 아직도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이 아름다운 생은 끝이 날까. 누가 얼른 와서 슬쩍 일러 다오. 가기 전, 술 한잔 부어줄 터이니.

* 아침, 마치 응답하듯 세찬 첫눈이 내린다. 괜스레 들뜨는 이 마음만 갖고도 한 세상 넉넉하지 않겠냐고.

꿈인들 곱게

이런저런 일로 0124님과 메신저를 주고받다,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난데없는 말에, 정당하게, 정직하게, 가난하게 살고 싶단 생각 요즘 자주 한다 전했더니, 저는 고요하게, 저항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단다. 그래, 꿈인들 곱게, 곱게.

대화 2

아침부터 바둑 두 판, 오목 네 판, 알까기 여덟 판으로도 모자라 놀아 달라 계속 보채는 녀석 겨우 달래고 좀 집중해서 책을 보고 있자는데, 난데없는 질문을 던지는 통에 토요일 오후 모처럼 재미있는 대화가 이어졌다. 이 글은 이 대목까지 포함하여 서연이의 검토 후 올리는 것이다. 대화 직후 스케치북에 날려 쓴 걸 모니터를 보며 함께 옮긴 것, 내용에 별 수정은 없었지만 어미나 조사를 꽤 바꿔야했다.

아빠랑 서연이가 없었을 때는 우리 어디 있었어요?
아빠랑 서연이가 없었을 때 우리는 없었지요, 뭐.
아니요, 우리가 없었을 때는 우리 어디 있었냐구요?
서연이는 아빠하고 엄마하고 결혼해서 태어났고요,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결혼해서 태어났잖아요.
증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 이런 것도 없었을 때는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을 때요?
네.
그때도 동물들은 있었지요.
근데요, 동물들도 없고 아무도 없었을 때는요?
그때는 아무 것도 없었지요, 뭐.
아니요, 지구도 없고 목성도 없고, 토성 이런 것도 없고, 그럴 때요?
그럼,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뭐.
아, 정말! 아니요, 하늘나라가 있잖아요?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건 알 수 없어요.
왜요?
알 수 없으니까요.
가본 사람이 있잖아요?
누구요?
죽은 사람이요.
근데 갔는지 모르잖아요.
왜요?
갔다가 다시 온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늘나라에 갔는지 그냥 없어졌는지 모르잖아요.
아, 재밌다. 근데요, 지구 위에는 하늘이 있잖아요, 그 위에는 뭐예요?
지구 위에는 우주지요, 지구도 우주의 한 부분이고요.
우주 위에는요?
우주는 그냥 우주지요, 그 위에도 다 우주고요.
우주 끝에 가면은요?
그래도 다 우주예요. 신기하지요?
네.
아빠도 신기해요.

바둑

원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녀석이라 아침마다 후닥닥거려도 밥도 다 못 먹고 세수도 제대로 못 하고 유치원에 데려다주기 일쑤였는데, 바둑에 재미를 붙이고부터는 (일찍 일어나면 아침에도 한 판 둔다는 말에)연이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아침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한 판, 저녁에 두세 판씩을 두는데 갈수록 나도 재미가 늘었다. 어느새 시간은 내가 더 많이 잡아먹곤 한다. 이기려고 꼼수를 짜내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것이다. 살짝살짝 요령을 일러주었더니 스다섯 점을 놓고도 내내 지던 녀석이 며칠 사이 내리 열일곱 점으로 내려앉았다. 나야 뭐 갈데없는 십급 바둑이지만, 한 판 더 두잔 말이 절로 나오는 딱 이 수준이 즐겁다.

로드

며칠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 빠져있었다. 절반은 Eleni Karaindrou의 Elegy of the Uprooting과 함께, 절반은 그마저도 없이. 도저한 절망과 많은 시들이 있었고, 예언과 사랑이 있었다. 아버지로서, 하나의 생물체로서 나는, 우리는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로드의 잿빛과 맞물려 그런가, 갈수록 찬 바람은 어찌 이리 서글프기만 한지 모르겠다. 돌돌돌돌 구르는 죽은 잎들의 소리. 그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더 스산한 일인지. 다시 책을 펼치며 손에 집히는 대로 그 세계의 편린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여름 드레스의 얇은 천 너머로 스타킹 끝 부분이 느껴진다. 이 장면을 고정시켜라. 이제 어둠과 추위를 내려달라고 해라. 저주를 받아라.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는 소년이 불을 지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의 불을 뿜는 용. 불꽃들이 위로 솟구쳐올라 별이 없는 어둠 속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한 말이라고 모두 진실은 아니야. 이 행복은 그 터전이 사라졌다 해도 변함없이 진짜야.

리볼버에는 총알이 한 알만 남았다. 네가 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저 사람들이 널 발견하면 그래야 돼. 알았지? 쉬. 울면 안 돼. 내 말 들려? 어떻게 하는지 알지. 그걸 입 안에 넣고 위를 겨냥해. 빨리 세게 해야 돼. 알았지? 울지 말라니까. 알아들었지?

지금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위험하게도 이 횡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에도 했던 말을 했다. 행운이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M6 스물여덟 번째 롤

제 자식 얼굴과 몸짓이 담겨 있어 더욱 그럴 테지만, 스캔한 걸 처음 모니터로 볼 때는 이번에도 그럴듯한 사진이 하나도 없구나 하다가도, 막상 올리려고 한 장 한 장 뺄 때엔 열두 번도 더 고민하게 된다. 삶에서도 무언가를 하나하나 덜어내는 기분일 때가 있다. 비어야 채운다지만, 어설픈 비유일 뿐이고, 채우고 싶은 욕심일 뿐이다. 그나마 사진을 고르듯 골라서 덜어내는 것이면 나으련만, 안 그래도 앙상한 마음들이 파르르 떨릴 때가 있다. 무릇 밀려나는 가슴이야 밀어내던 가슴을 헤아릴 길 없는 법, 문득 그렇게 지나간 사진들이 밟힌다.

* Leica M6, summicron 35mm 4th, 코닥 포트라160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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