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옛날 옛날 한 옛날에, 구봉명파출소네거리 근처에, 박땡땡 어린이, 밥 많이 먹고 치카치카 잘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이 대목은 필요에 따라 때때로 바뀐다) 착한 어린이랑 김땡땡 어머니랑 박땡땡 아버지랑(때에 따라서 양동생이랑 오리 두 마리랑 거북이 두 마리랑 방귀대장 뿡뿡이랑 미피랑 등등 이어지기도 하는데) 살았어요. 어느 날, 박서연 어린이 착한 어린이는 하며 밤이면 자기 전에 서연이랑 나란히 누워 그날 있었던 일이나 며칠 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곤 한다. 때때로 옛날 옛날 한 옛날에 깊은 숲속에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았어요 하고 되나마나 진짜 옛날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고. 꼭 내가 하기 좋아서 한다기 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려 긴 이야기의 경우 미리 못을 박고 한 가지 이야기만 하기도 하지만, 짧은 이야기의 경우 서너 가지를 해야만 한다. 피곤할 땐 때로 곤욕이기도 하지만 어떨 땐 짜릿한 교감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땐 대체로 나도 깊은 잠을 자는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이 녀석 근황 이야길 좀 하자면, 아직 한글이나 숫자에 대해 집에서나 어린이집에서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약간 더듬거리나마 처음 보는 책도 대부분 읽어내고 십삼 더하기 이십사 정도 되는 덧셈도 크게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전부터 한번씩 낱말이나 문장을 재미있게 비트는 걸 보고 언어 감각이 뛰어난 것 같아 내심 좋아하였는데, 어린이집 담당 선생님의 의견은 좀 달랐다. 물론 새학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서연이를 오래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때 제 어미와 시간이 맞지 않아 내키지 않았지만 그 어린 여선생님과 학부모 면담이라고 마주앉았는데, 생각과 달리 한 시간이 아쉬운게 끝나고나니 꼭 내가 무슨 정신상담이라도 받은 듯 마음이 맑고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선생님 의견으로는 언어가 아니라 숫자 개념이 또래 보다 좀 빠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숫제 언어 쪽은 뒤쪽이라는 듯이. 어쨌든 이 녀석이 아는 척 하기 좋아하고 일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내성적이며 어린애 같은 밝음이 다소 부족한 게 걸리긴 하지만, 딱 이 녀석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 아이가 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고슴도치라 놀려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고등학교 일학년 때까지 참 내성적인 아이였다. 밖에서는 누가 봐도 착한 아이였으며 소심했고 조용했다. 이학년 때부터 의도적인 일탈을 하며 여러 부류의 친구들을 만나고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낯을 가리고 어디 도드라지는 걸 싫어하는 건 여전하다(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무리에서 가장 앞서길 바라는 편이지만). 십대 후반의 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술, 친구, 가족, 염세, 반항, 하야로비, 실존주의 뭐 이런 것들이다. 이십대 전반을 생각하면 역시 술, 그리고 공동체, 노천문학, 햇살, 철없던 사랑 뭐 그런게 떠오른다. 내친 김에 이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전반까지 생각해보면 술, 이별, 아픔, 망각, 웅크림, 두려움 그런게 떠오른다. 훗날 지금을 돌아보면 뭐가 떠오를까. 위선, 아이, 현실, 갈 곳 없음 뭐 그런게 떠오를까. 어젯밤 문득 서연이에게 옛날 이야길 들려주다 늘상 반복하는 이 이야기의 앞머리를 써 보잔 생각을 했는데 갈데없이 되어버렸다.

* 나흘간의 연휴가 후딱 지나갔다. 캐리비안의 해적이나 밀양 정도는 보리라 마음 먹었었는데, 사흘 내리 술을 먹는 바람에 낮시간 동안은 운신을 못하고 누워 보냈다. 세 술자리 모두 즐겁고 의미 있는 자리였던지라 아쉬울 건 없고, 덕분에 바리에떼와 고향길을 완독할 수 있었다. 일전에도 느낀 바지만 고종석의 글들은 대체로 시각도 바르고 공감가는 부분도 많을 뿐아니라 특히 글솜씨가 빼어나 잘 읽힌다. 어렵거나 힘든 문장이 아닌데도 앞 문장을 다시 읽게 만드는 힘도 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흔쾌히 고개 끄덕이며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데, 그래서 어딘지 한 구석 불편하곤 한데, 이틀째 술 먹은 다음날 아침 마치 밤새 고민한 듯 일어나자마자 뱅뱅 돈 문장이 거기에 닿아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비명을 찾아서를 감명 깊게 본 나로서는 복거일의 이후 행보가 얼마나 마뜩잖았는지 모른다. 이 책도 다른 이의 글에서 고종석의 그에 대한 애정과 평(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보고 궁금하여 산 것이기도 한데, 어떻든 복거일은 김훈에 많이 닿아 있고 고종석은 그보다는 훨씬 건전하고 건강해 보인다. B급 좌파 김규항에 비하자면 거칠게 표현하여 김규항의 글들은 읽는 내내 긴장하고 불편하게 하지만 결국 공감하고 따를 수밖에 없게 하는 반면, 고종석의 글들은 편하게 공감하며 읽지만 어딘가 불편한 구석을 남기는 것이다. 아니다. 거꾸로 이렇게 표현해도 맞는 말이 된다. 김규항의 글은 읽는 내내 깊이 공감하고 함께 하지만 나중에 그 실천에 대한 고민과 엄격함에 이르면 불편하지 않을 수 없고, 고종석의 글은 읽는 동안 일견 불편하지만 다 읽고 나면 어딘가 위안 받는 기분이 되곤 한다. 그러나 한 주에 한 번 일용할 양식에 감사한다고 일용한 죄악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고종석처럼 자리하기란 우리 사회에서 귀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편하기도 한 것이다. 나부터도 그런 자세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 마음도 몸도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안전하게 스스로와 주변을 유지하며 메스를 덜 들이댄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그걸 잘 인지하고 있으며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어 크게 나무랄 일이야 아니지만, 예컨대 바리에떼에서 다음의 글들이 주는 울림은 내 마음자락과 크게 공명하지만 한편 공허하다. 맥락은 물론 다르지만 말하자면 집단적 정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보다 백만배는 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집단을 죽이는 것이 어이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아름다운 제언 역시 실천적 관점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에서 한발짝 떨어진 듯 보여 안타깝다. 하나 덧붙이자면 그의 세련되고 단아해 뵈는 글들은 이 책에 실린 일부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 언급에 이르면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형식에서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은 어쩌면 뛰어난 소설가 복거일, 잡문가 김훈이 다른 언설을 할 때 형편없어지는 모습을 닮아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마르크스주의에 마음이 쏠린 적이 없다. 집단에 대한 내 공포가 생래적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자본론을 끝까지 읽어낼 끈기와 지성이 내게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80년대 들어 ‘불법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책들을 들춰보기는 했다. 물론 마음이 쏠리지 않았다. 그것은 날림번역이 낳은 거친 문장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불확실한 방향으로 치닫는 집단적 열정이 낳을 수 있는 파멸적 결과가 두려웠고, 인간의 이타심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 그러나 나를 공산주의로부터 밀쳐낸 더 중요한 이유는 단 한 번뿐인 생애에 대한 존중이었던 것 같다. 차라리 내가 기독교 신자였다면, 그러니까 영혼의 불멸이나 다음 세상을 믿었다면, 공산주의에 쏠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종교가 없(었)고, 그래서 나는 영혼의 불멸도 다음 세상도 믿지 않는다. 즉 내 죽음은 내게 우주의 소멸이다. 물론 타인의 죽음도 그들에게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는 받아들인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개인에게 우주의 소멸이다. 그렇다면 집단적 정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중략) 세계화 자체는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아닌, 다른 방식의 세계화,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일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의 공산주의가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진정한 국제주의를 새롭게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국제주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들 사이의 느슨하지만 질긴 연대를 통해 구축될 것이다.

고진감래

그래서 결국 누구 편이냐 하는 거다. 내가 낸데도 아니고 나는 내 편이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이다. 어차피 혼자 살 게 아닌 바에야.

달팽이, 안녕

팔 개월 가량 함께 했던 달팽이가 죽었다. 며칠 제대로 살피지 못하다 어제 아침에 들여다 보았더니 기척이 없었다. 그 놈의 특성상 무슨 대단한 정서적 교감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그닥 크게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지만 미안하고 어딘가 한 구석이 허전하다.

오후에는 서연이랑 우방랜드에 갔다 왔다. 하루종일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 두시쯤부터 여덟시까지 둘이서만 있었는데, 나는 코끼리, 하늘 자동차, 춤추는 비행기, 어린이 바이킹에다 코인 놀이기구 등을 타고 자연생태공원까지 일대를 다 돌아다녔다. 제 엄마가 오고부터 길게 줄을 서지 않아도 되어 어린이 자이로드롭과 탔던 놀이기구들을 다시 타고 혼자 타기 어려운 회전목마, 풍선타기, 후룸라이드를 탔다.

집 근처에서 늦게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으면서도 말했지만, 사실 늘보 기질이 다분한 내게 물론 더 나은 시간을 위해서라지만 일요일까지 제 시간으로 할애하여 자기 일에 집중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들놈과 충분히 가까울 수 있어 이런 복도 있구나 생각하다가도 문득문득 내가 없어지는 환영에 사로잡히곤 했다. 허나 어젠 이제 익숙해져 버린 건지 서연이 웃음에 단단히 중독된 건지 견딜만 하단 생각을 많이 했다. 긴 시간 몹쓸 죄를 지었다. 달팽이의 안녕을 기원한다.

가나다라

퇴근길에 라디오에서 송창식의 가나다라를 들었다. 어쩌다 보니 서연이에게 맨 처음 가르쳐준 노래이기도 한데, 그래서 이 녀석이 동성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가나다라마바사아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여러 사람 즐겁게 한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역시 천재란 이런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에헤헤 으헤으헤 으허허
하고 싶은 말들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노래는 너무너무 짧고
일이삼사오륙칠팔구하고십이요 에헤헤 으헤으헤 으허허
하고 싶은 일들은 너무 너무 많은데 이내 두 팔이 너무 모자라고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허 웃음 한번 웃자
어기여 어기여 어기여 어기여
노를 저어 나아가라 가자 가자 가자 가슴 한번 다시 펴고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루황 에헤헤 으헤으헤 으허허
알고 싶은 진리는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머리가 너무너무 작고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허 웃음 한번 웃자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에헤헤 으헤으헤 으허허
좇고 싶은 인물은 너무너무 많은데 이내 다리가 너무너무 짧고
갑자을축병인정묘무진기사경오신미 에헤헤 으헤으헤 으허허
잡고 싶은 순간은 너무너무 많은데 가는 세월은 너무 빠르고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허 웃음 한번 웃자
어기여 어기여 어기여 어기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뱅글 뱅글 뱅글 다시 보면 다시 그 자리

중건천 중곤지 수뢰둔 산수몽 에헤헤 으헤으헤 으허허
하늘 보고 땅 보고 여기저기 보아도 세상만사는 너무너무 깊고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허 웃음 한번 웃자
일엽편주에 이 마음 띄우고 허 웃음 한번 크게 웃자고

무료하다, 요즘. 뭔가 밀린 일들을 한꺼번에 끝내고 따분한 일상을 맞는 기분이긴 한데, 한꺼번에 끝낸 일도 없고 일상은 어째 낯설기만 하다.

서연이를 재울 때나 딱히 놀이거리가 없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 될 때가 있다.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는 죽음이나 떠남 같은 이야기에는 전혀 동요가 없지만, 자신의 먼 미래나 좀 지난 이야기를 할 때면 뭔가 아득한 느낌을 받는가 보다. 혼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구나 하는 게 전해지면서 가녀린 짐승을 안고 있는 듯 그 감정에 전이되어 나도 꽤 아득해지곤 한다.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일에 있는 벌레를 모르고 먹으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었다(딴 얘기지만 벌레 먹은 사과가 맛있다는 영화도 있었지, 아마). 이제 벌레 먹은 과일이나 과일에서 나온 벌레를 보기란 목사나 장로가 천국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우리가 우리끼리 살겠다고 바둥치는 건 내가 내 혼자 살겠다고 바둥대는 것보다 더욱 위험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도 틀림없이 동물인지라 생명체로서의 기본적인 욕구에 해당하는 것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섬세하기까지 한 동물이라 그 다채로운 결들에 있어서랴.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놈들을 얼마간 경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갈 도리야 옛 사람들이 이미 마르고 닳도록 설해 놓았지만, 때로 우리는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 대책 없이 주저앉곤 한다. 개도 안 물어갈 현실 앞에.

오늘 돌아다니다 만난 한 구절,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아 그 높음을 이룰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아 그 깊음을 얻을 수 있었다(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시중에서 흔히 쓰는 의미나 출전의 본래 뜻과 관계없이 아옹다옹거리는 세상사를 빗대는 것 같아 오히려 장자연하게 와닿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 한 백만년만에 책 몇 권 주문하였다. 윤중호의 고향길, 움베르토 에코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맙시다, 고종석의 바리에떼. 얼마동안 읽을 지 모르겠다.

팔공산

어제 한 모임에서 영천 신령에 있는 수도사로부터 팔공산 동봉엘 올랐다가 수태골로 내려왔다. 다섯 시간 정도 걸었다. 중턱부터는 아직 겨울산이었다. 그늘진 곳이 많아 그런가 키 큰 진달래(참꽃)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아직 피지 않은 게 더 많았다. 내려오는 길에 어릴 적 생각하며 꽃잎 하나 따서 먹어보았는데 달콤쌉싸름한 맛은 그대로였다. 대구은행 연수원 근처 식당에서 오리고기에 술을 잔뜩 먹고 돌아와서는 다른 모임 자리로 가 또 그만큼을 먹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가뿐한 게 맑은 공기와 오래 걷는 등산이 좋긴 좋은가 보다. 의식이나 행동이나 술이나 과잉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잘 되지 않는 게 또 사람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려올 때는 여전히 무릎이 아팠다.

주절주절

즐겨찾기를 즐겨 찾다 보면, 이라고 말하다 보면 즐겨 라는 말이 낯설게 다가서며 그 말의 아름다움에 빠지기도 한다. 어쨌든 즐겨 찾다 보면 때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는 글들도 만나게 된다.

최근 들어 다시 대화를 하거나 또는 사이트 항해를 하다가 문득문득 눈물이 날 뻔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꿈속에서는 가끔 울기도 하는 모양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그 효용이 아니라 차이와 기호를 소비한다. 라이카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딱 그만큼은 자유롭기도 하다. 아날로그의 효용에서 그러하다.

사진을 찍다보면 인화물이든 파일이든 결과물이 남기도 하지만 찍은 그 순간이 머리나 가슴에 그냥 각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장면들은 종종 뜬금없이 출몰하기도 해서 오래오래 함께 가곤 한다.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천당이니 극락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이런 델 가진 않을 것 같다. 뉘라서 그리 한단 말인가. 오늘 잠시 이야기하던 중 뱉은 말이기도 한데,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지도 않고 나중에 개입하려 든다면 당당히 따질 일이지 그게 그저 받아들일 일이겠는가.

어릴 적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까지 누가 물어보거나 어디 써낼 때는 으레 그렇게 답하곤 했다. 어려서 읽은 우주와 우주 개발 이라는 책 때문인지도 모른다. 커서 뭐가 될래, 또는 넌 꿈이 뭐냐는 식의 질문은 가히 폭력에 가깝지만 가끔 곱씹어보곤 한다. 넌 도대체 꿈이 뭐냐.

술 먹고 난 다음날이면 먹을 때처럼 괜히 기분도 좋고 머리 속으로 하냥 주절주절 거리기도 한다. 그 힘을 빌려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사르트르는 일찍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창조주를 믿지 않는다면 어찌 보면 당연한 언설이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질을 무한정 확장시켜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소통과 연대에서 출발하고 귀결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도 점차 단절과 소외가 일상화되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이 추구하여야 할 가치라는 것도 잊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대다수 사람에게 사는 목적을 생각할 겨를은 없어져 버렸으며 그럴 겨를이 있는 사람들은 혼자서도 잘 살아간다.

이제 동네 길거리에서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꾸짖는 모습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골목은 사라졌고 흙은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에나 가야 볼 수 있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 전만 하여도 버스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들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에게는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 많아졌다. 정작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회피하고 치장하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우리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유는 소중하다. 자유를 확장하는 물질적 조건도 마찬가지로 소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곰곰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유가 행복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김남주는 만인을 위하여 노력할 때 나는 자유라고 이야기하였으며 니체는 무엇에 대하여 자유롭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가 물려줄 최선의 것은 지금의 파괴를 가속화해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 터놓고 술 한 잔 기울일 친구가 없어 매일매일 자신을 조금씩 죽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꾸미고 거짓 대화를 하며 남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을 위하여 사는 게 아닌 다음에야 자신은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따뜻한 동화 한 편 써보려던 것이 메모만 나열한 글이 되고 말았다. 삶은 달걀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지만, 부활절을 기린다며 멀쩡한 달걀을 집단적으로 대량으로 삶아 먹고 나누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무정란이라 할지라도.

지난 4월 8일은 결혼 6주년 되는 날이었다. 기념일 알리미 서비스 덕에 일주일 전부터 새기고 있었는데 막상 당일은 잊어먹고 지나가 버렸다.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말인데, 참한 아가씨가 오래된 친구나 후배를 만나 사귀거나 결혼한다면 꼭 하는 말이기도 한데, 서연이나 이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면 꼭 떠오르는 말인데, 참 고맙다.

아름다운 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다 아는 김구 말씀인데, 오늘따라 이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우리가 작은 약속을 지키고 신의를 생명처럼 여기며 돈과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을 수 있다면 죽음을 마주하여도 조금은 더 당당하지 않을까. 어느 순간 삶이 날카로운 사금파리처럼 다가선다 하여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한미FTA 타결 이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오르고 그전에 비해 FTA에 대한 찬성 여론이 반대 여론을 많이 앞서고 있다. 대통령이 논개처럼 한나라당이라는 적장을 껴안고 FTA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여권 대통령을 당선시키려는 시나리오를 펼치고 있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흔쾌히 웃기에는 뒷맛이 많이 씁쓸하다. 한편에서 국민투표가 화두가 되고 있지만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 찬성이 많지 않을 것이라 예견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에 부합할지라도 그럴 경우 더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인다. 이번 타결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다수 언론과 결단하는 리더쉽에 쉽게 열광하는 국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 전술이 먹혀들지 걱정이다. 어쨌거나 이를 기회로 시민사회가 학습을 통해 더욱 성숙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략적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막막하고 먹먹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애초 정치사회적인 구체적 사안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지만, 한가하게 가족 소사나 읊기에는 돌아가는 세태가 짐짓 두려울 따름이다(어쨌든 대통령에게서 묘한 어떤 동질감을 느껴오던 터였다. 나와 다른 부류임이 분명해졌지만 역시 설익고 덜떨어진 사람이 어디 나서는 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이다. 하물며 확신범임에랴).

체계적인 교육과 충분한 교양,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바른 역사적 안목,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원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지도자를 갖기에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너무 짧고 우리가 우리에게 저지른 죄가 너무 큰지도 모른다. 역시 구성원은 그 구성원의 수준을 뛰어넘는 지도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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