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

빛나는 청승도 저 세상도
피었으니 시들 일 있으리
윤이월 그믐에 꽃이사 피었겠건만
다 잊었겠건만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지 않겠느냐
드러나지 않아도 드러내지 않겠느냐
점점이
점점

사월

사월이 길을 나선다. 길이 벌떡 일어난다.
사월에 비가 온다. 세월이 비에 젖는다.
사월이 꽃을 꺾는다. 꽃이 꺾인다.
사월에 꿈을 꾼다. 새가 울고 세상이 저문다.
사월이 집을 짓는다. 잔월에 그림자가 길다.
사월이 사월에 사위고 사월에 불탄다.

그래

어려운 걸 하는 거지.
담배는 끊고 술은 줄이고.
취하거나 포만감 없이.
기억을 잃지 않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살뜰히, 천천히.

* 백 근은 넘어야지 하던 몸무게가 어느새 백이십 근이 너끈하고, 폭음을 하지 않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술자리가 잦다. 몸에 안 맞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담배는 입에 대지 않은 지 삼십 개월째, 모난 성정에 정을 대듯 스스로 다짐을 새겨 둔다.

어떤 봄

비가 내린다. 아파트 단지가 둥둥, 만개한 벚꽃이 까르르. 다 잊었다는 듯, 밤을 지나고도 한참 더 올 모양이다. 흙내에 도시가 기우뚱. 이른 출근길, 어제 본 목련 꽃잎이 물 밖에 나온 금붕어처럼 아스팔트에 젖어 있었다. 등불처럼 환하던 것이 조금 뒤척이다가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비껴 선 라일락은 잎을 조금 더 내밀었고 매화는 제 소식을 다 전한 양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마음에는 봄이 내리고 어떤 마음에는 바람이 불었다. 궐련을 건네던 수줍은 얼굴, 우산살 끝에서는 어떤 봄이 무너져 내렸다. 비가 내리고, 세상의 끝으로 갈 것이 간다.

긴 여정에

지난 토요일, 거실과 방, 주방의 등기구들을 LED로 교체하였다. 오래 벼르기만 하다 마침 공동구매 행사가 있어 맞춘 것인데, 따로 구매한 전구색 식탁등이 꽤 마음에 든다. 사는 곳이 조금 더 밝고 단순해졌다. 긴 여정에 뭐 하나 잘 빼거나 더한 기분. 다음은 최백호의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 한 대목. 나 같은 음치도 기꺼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글보다 그림이 더 좋았고, 어떤 마음이 고마웠다. 사는 것이 조금 더 애틋해졌다.

미술이나 문학은 인간이 만든 인간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음악은 먼 우주에서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좋은 멜로디는 다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천만에 아직도 온 우주에 무궁무진하다. 흘러넘친다.

또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또 봄이 오고 저기 저쯤, 겨울을 살던 너는 가고 다른 네가 방긋 웃는다. 물이 오르고 막이 내린다. 또르륵 세상이 구르고 저기 저쯤, 모른 척 다시 네가 나타난다.

어떤 주정

맞아요, 인생은 슬픈 구석이 있어요. 네, 건배. 그래요, 소멸이 예정되어 있고 이별이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요, 살아있을 때에도 온전할 수 없고 만날 때에도 제대로 알거나 소통할 수 없지요. 그게 인생의 참맛이니 어쩌니 해도 슬픈 건 어쩔 수 없겠지요. 아무렴, 인생이 슬프거나 말거나 그게 뭔 대수일까요만. 네, 어제는, 그래요, 어쩌면 내일은, 달랐거나 다를 수 있을 거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말고요. 네, 한 병 더. 그렇지요, 그렇게 욕망을 소진하고, 흥미를 잃고, 약간의 강박과 약간의 관념에다 약간의 소신을 더하다 보면, 종착이지요. 일찍이 배운 바를 늦게까지 잘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 아무렴요, 서글픈 일이고 말고요. 그래요, 건배. 그런데, 사는 게 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고, 별 게 또 별 게 아니기도 하더란 말이지요. 다 놓아도 놓지 않는 그것도, 꼭 붙잡던 어떤 것도 다 놓을 때가 있더란 말이지요. 네, 위하여. 애정보다는 우정을, 사랑보다는 의리를. 그렇지요. 누가 말했던가요, 무엇으로부터 자유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런데 말입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도 좋지만 무슨 수로 자유인가 묻지 않을 수 없더란 말이지요. 좋지요, 한 병 더. 그럴 리가요, 해답이 사랑이거나 운명일 수는 없지요. 그렇고 말고요. 네, 그저 하나의 똥덩어리일 뿐이지요. 똥통을 헤쳐 나가는 우아한 똥덩어리, 필시 똥통을 이루고야 말 행복한 똥덩어리들일 뿐이지요. 그럼요.

언젠가 사월이면

폭포는 그 이름이 폭포요, 들에 핀 꽃은 그 자체가 들에 핀 꽃이다. 소한과 대한 사이 가는 햇살에도 산이 무너지고 멀쩡하던 연인이 헤어진다. 누구는 자빠지고 누구는 자빠진 김에 일어나지 않는다. 수염이 자라고부터 꼬박 일주일을 면도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이 겨울, 침묵을 두고 너도 멀리 가려느냐. 면역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 법, 문득 옛날이 그리워 송창식과 한영애의 목련을 반복하여 듣는다. ‘가만히 떠는 그 물’과 ‘늦가을 설운 정’을 생각하며 오래된 나무의 도수에 취한다. 바깥 세상에도 어느새 노을이 진다. ‘언젠가 사월이면’ 너도 아름답게 물들일.

첫눈을 보며

첫눈이 온 날, 혁명 기념일에 기념탑 앞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생각한다. 하얗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성냥불처럼 꺼졌어도 화약으로 타올랐던 이들에 대해 잠시 생각한다. 첫눈이 오면 만나기로 한 사람도 생각한다. 그 사람은 이미 까맣게 잊었거나 첫눈을 핑계로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세월에 녹아 벌써 없어졌고 어쩌면 나처럼 장소와 사람이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그저 첫눈을 보며 가물가물 옛일을 생각한다. 시절이 좋아 어디서든 단 한 번을 기다리지 않고 다만 먼일을 기약한다.

사계동행

사계동행 친구들과 토, 일 거제도에 다녀왔다. 이 모임에서 식구들 빼고 일박으로 어디 다녀온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남다른 감회들이 있었다. 덕포해수욕장에 있는 한 친구의 옛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조개찜과 구이를 안주로 술을 잔뜩 먹고 노래방에 가 노래도 불렀다. 아침은 인근에서 굴국밥, 점심은 돌아오는 길에 밀양 유천본동식당에서 잡어추어탕을 먹었다. 역사가 있는 집인 모양인데 우거지를 넣고 잡어로 추어탕처럼 끓여 낸 게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오가며 해저터널과 거가대교, 짙푸른 바다가 인상에 남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든 오랜 친구들과 대화가 좋았다. 사계동행은 만나고 나면 늘 배우고 조금 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인연이 여기에 이른 것에 감사한다. 누구의 건배사처럼 육십에도 무사히 보기를. 여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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