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지난 수요일, 0124님의 갑작스런 제안에 응하여 당일치기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침 6시 35분 출발하여 저녁 8시 25분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 중문면세점에서 카발란 비노바리끄와 아벨라워 아부나흐를 사고, 주상절리대, 송악산을 들렀다가 협재로 넘어가 해안도로를 따라 돌아왔다. 역시 더울 때에는 어디 나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하였지만, 모처럼 쐬는 바깥 바람이 나쁘지 않았다. 산방산과 송악산 앞 바닷빛과 애월 쪽 길 느낌이 좋았다. 지나다 우연히 본 귤림성 이정표가 반가웠다. 투덜거릴 줄이나 아는 부실한 몸뚱아리를 데리고 종일 운전하며 다닌 0124님의 노고 덕에 호사를 누렸다.

위스키를 모아놓고 눈호강이나 하며 어쩌다 몇 잔 먹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취하는 자리, 취하는 사람이야 그립지 않으랴만, 어쩌랴, 그립다고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

어느 하루

한 세월 중독자처럼 살기도 하였고 한 시절 눈보라처럼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바람 따라 훨훨, 여름에는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이면 봄을 반겼지. 흙에서 흙으로, 한세상 푸르른 심연을 바라보며 살았다. 어느 하루, 긴 잠 끝에 긴 꿈을 접고.

인생은 진리 탐구의 영역이 아니라 같은 전제에서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하고 다른 전제에서 같은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답이다. 산다는 게 여전히 새삼스럽기 한이 없구나. 모쪼록 누구든 오래도록 살아 있으라.

장진주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콸콸 흘러 바다에 이르면 다시는 못 돌아오는 것을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권세 높은 사람들도 밝은 거울 앞에서는 센 머리를 슬퍼함을
아침에는 푸른 실 같았거니 저녁 무렵 흰 눈으로 되었네
사람으로 태어나서 큰 뜻을 이뤘다면 모름지기 온갖 기쁨 다 누려야 하는 것을
술도 안 든 금단지가 달 맞는 일 없게 하라
하늘이 나를 낳고 재주까지 주셨으니 반드시 있으리라 긴요하게 쓰일 일이
천금이나 많은 재물 마구 뿌려 쓴다 해도 되돌아오는 것이 이 세상 이치일세
양 잡아라 소도 삶고 이제부터 즐기리라
마신다면 한 자리에 삼백 잔은 되어야지
잠부자여, 단구생이여
술 한 잔 올리오니 그대들은 막지 마소
그대들께 바치리니 한 곡조 술 노래를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주오
귀한 음악 산해진미 그 무엇이 부럽겠소
바라기는 오직 하나 오래 취해 안 깨는 것
예로부터 성인, 현인 모두 죽어 쓸쓸한데
이름 남긴 사람들은 술꾼들뿐이로다
그 옛날에 진사왕이 평락관서 벌인 잔치
만금 줘야 사는 술을 흥청망청 마셔댔지
주인아! 어찌하여 돈 없다고 말하는고
곧바로 술을 구해 그대들께 따르리라
오화마도 천금구도 아까울 것 무엇이뇨
아이 불러 내보내서 맛난 술과 바꿔오라
그대들과 함께하며 오랜 시름 녹이리라

李白의 將進酒. 며칠 전 연세 지긋하신 어떤 분이 한자 원문으로 부르는 창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술을 앞에 두고도 마시지 않았으나 계속 떠올라 옮겨 둔다. 정철의 장진주사도 그렇고, 즐기고 누리는 일이 아득하기만 하여라.

잔만딱두

즐기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좋아하여 자주 하다, 즐겁게 누리다라고 한다. 누리다는 마음껏 즐기거나 맛보다라고 하고. 자주, 마음껏 말고 적당히, 나누어 천천히 즐기자는 생각을 언제부터 하였던가. 처음 하는 각오인 듯, 마음을 굳게 다지고자 사전도 찾고 기록도 남긴다. 잔만딱두, 두너!!

*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아껴 읽고 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아까워 한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곤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 읽으면 옆에 두고 더 오랫동안 다시 읽으리라.

부엉이가 울고

누구나 인생을 좀 누릴 일, 잘 있다 가도록 하자. 꾸미고 즐기고 좋은 구경도 하면서 하고 싶은 것도 더 마음껏 하자. 일러도 이를 게 없고 늦어도 늦은 게 아니다. 기회를 노리고 여건을 만들어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뭘 남기지 말자. 미련도 회한도 비에 씻고 바람에 날리자. 타인의 세계가 아니라 내 세계를 살고 우리보다 나를 생각할 일이다. 여력이 있을 때 세계를 확장하고 도모할 일이다. 갔다가도 돌아올 일이다. 밤새 부엉이가 울고 다시 눈이 침침해진다.

다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기억에는 까마득히 오래된 것 같은데, 늘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기분이다. 진짜 자신과는 떨어져 있으나 적당히 무리에 섞여 인정 받으며 사는 삶과 외로우나마 고집을 부리며 잠행하듯 사는 삶 사이에서. 때때로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지만 대체로 경계 위에 서 있게 된다. 사는 게 호락호락, 쉽고 단순하지는 않은 것이겠지. 그리 쉽게 단순하고 쉬워지지는 않는 것이겠지. 가볍게 사는 쪽과 무게를 안고 사는 쪽 사이에서 길을 잃고 가벼운 무게에 눌려 바스러지기도 하고, 한 세상 오늘만 보고 살거나 제대로 한번 제정신으로 살기도 한다. 그러한 작정의 이쪽저쪽에는 늘 술이 한몫하여 주기적으로 끊었다 잇곤 한다. 어느 한쪽인들 치우치지 말라고 말짱하다가도 취하고 다 무너졌다가도 슬슬 일어서곤 한다. 경계를 타듯 줄이거나 즐기지 못하니 널이라도 뛰듯 오르내리는 것이다. 오르내리며 즐기는 것이다. 먼 길에 제자리 맴맴이라 즐기는 것이 즐기는 것이랴만, 다만 인연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렇게 즐기는 것이다.

이만하면 누구나

나이가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게 뭘까. 바람은 작고 고민은 크며 기쁨은 적고 슬픔은 많구나. 싫은 사람은 피하면 그만이고 여전히 좋은 사람은 드무니, 사람은 적고 그리운 날은 많기도 하다. 지난날은 길고 앞날은 짧아서 그런 걸까. 기억이 가물거려 언제 귀밑머리 센 줄 모르겠다.

딱 싫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 아둔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거짓을 일삼고 언행이 가벼운 사람, 여러 잣대를 갖고 있는 사람, 이익이 앞서고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 그들이다. 좋은 사람으로는 우선 진솔하고 담백하면 된다. 싫은 유형의 반대면 족하고, 사회적 식견과 인문학적 교양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감히 바라건대 예술적 소양에 유머와 직관을 겸비하여 인간적인 매력까지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마는.

꼬장꼬장하면서도 부드러운, 다 이해해도 다 받아들이지 않는, 다가오지 않아도 다가가는, 아직은 갈 데까지 가 보는 정신과 자세를 갖고 낙치, 백발에 맞설 일이다. 이만하면 누구나 나머지 청춘을 사르고 말겠다고 노욕을 부리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마무리에 대하여

그게 다 착란에 의한 어떤 작난 같은 거지요. 여기 없는 건 거기도 없어요.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오늘이 오듯 작고 단순한 작난 같은 것. 마치 사랑이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흉내내며 살다 가는, 조막만한 그릇들의 밀회 같은 것이지요. 그래요, 오늘은 봄이 길어 뒤숭숭한 별들에 건배합니다. 먼저 간 이들과 아직 남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두루 잘 살았으면 했고, 멋스럽게 늙고 싶었지요. 사랑이나 낭만을 위해서라면 다 걸 것처럼 살았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즐겼으며 다른 잣대를 싫어하고 꺼렸습니다. 해 질 무렵과 가을을 좋아했고, 사람이 좋고 사람이 싫었습니다. 누구나 하는 마무리. 뜬금없이 아래 김영민의 가벼운 고백에서 한 대목 옮깁니다. 그럼요, 언제나 그렇듯 무소식이 희소식이지요.

좋은 가을 하늘이다. 어쩌라는 걸까. 다르게 살아보라는 걸까.

푸른 산그늘에

잊자 잊어버리자 별 거 있나 그렇게 세월만 보내다 그저 사람이 좋아 뭐 다 살자고 하긴 그러다 보면 그저 잊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또 한 시절이 아니 너는 누구니 생각 없는 얼굴이 그저 한 세상이 가고 다시 오지 않을 거긴 어디니 오래 잊으려다 잊으려던 널 까맣게 그 시절이 어디 가고 언제 가버린 건지 기억이 그저 적막이 아니 별 볼 일 없는 꿈이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없는 세월이 어디서 뚝 잊지 마오 푸른 산그늘에 걸린 처량할손 작은 거미

* 일부러 따온 건 아니지만, 적막과 처량은 마침 읽은 홍자성의 채근담 1장에 같은 단어가 있었다는 걸 사흗날 아침에 덧붙여 둔다. 제대로 붙잡고 읽다가 뒤에 알았다. 책은 도광순 역주로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건데 다른 역자나 출판사의 것은 볼 것도 없이 이게 제일이다. 다음은 그 1장. 바로 전 근사록의 역자도 도광순이었다.

도덕을 지키면서 사는 이는 일시적으로만 적막하지만, 권세에 의지하고 아첨하며 사는 이는 영원히 처량하다. 달인은 사물 밖에 있는 사물을 보며 자신의 배후에 있는 자기를 생각한다. 차라리 일시적인 적막함을 감수할지라도 영원한 처량함은 당하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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