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노안이 찾아왔다. 가까운 것도 먼 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는 취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탄자니아나 과테말라를 앞에 두고 그리운 것들을 생각한다. 흐린 향기 속에 지나간 것인지 다가올 것인지 모를 것을 그리워한다. 느린 맥박이 뛰고, 조바심 같은 것이 익숙하게 머물다 간다. 창밖으로 계절이 지난다. 그래, 습관처럼 나는 늘 남은 계절의 흔적을 찾았지. 푸석푸석한 껍질 아래 철마다 구멍이 생겼다. 깊은 고동, 몹쓸 가슴으로 오래 너를 만난다. 너는 너의 미덕으로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나눴다. 다시 겨울 한낮이 저문다.

봄날은 간다

달이 두 개 뜨는 밤이면 남몰래 산소 하나에 수소 둘을 섞어 먹었다. 꽃잎을 띄우거나 썩은 열매도 넣었다. 그럴 때면 어디서 육식으로 충혈 된 토끼가 튀어나와 꿈결 따라 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서로 미워할 이유 따윈 없어도, 언제나 적은 많았고 우리는 꾸밀 게 있었다. 저나 나나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산제비나 청노새가 풀잎보다 나을 게 없었다. 엊그제 먹은 술이 덜 깨서 오늘은 첫잔부터 모든 게 달았다.

남은 인연이 있을까,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간다. 까마득히 푸른 밤, 더없이 긴 발목을 움켜쥐고 달의 표면에 네 머리통을 후려친다. 그렇게, 봄날은 간다.

꿈결에

꿈결에 꿈길을
꿈꾸듯 꿈꾸듯 걸었다
길 끝이 네 꿈에 닿아
꿈이구나
꿈이구나 알았다
버려진 아이처럼
그 길 끝에
꿈꾸듯
다시, 잠이 들었다

9월 22일

이별에는 합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미처 예비하지 못했다면 떠난 후에라도 고통과 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세상과 연이 다한 경우라면 마땅한 격식과 순서를 더해야 한다. 기꺼이 너의 기일을 기록해 둔다. 끝내 제게만 모질었던 김요셉, 마땅히 성자의 반열에 올라 영원한 안식을 누리리라.

나머지 여름

가을, 여름이 다하지 않은 가을이다. 필시 언제 어디서 나머지 여름이 작열할 것이다. 팔월 중순의 한밤, 술집들이 다 익은 알밤처럼 출입문을 열고 있다. 어디선가 낯익은 별이 떨어지고, 일행과 헤어진 나는 떨어진 별처럼 아무렇게나 손님 없는 빈집으로 들어간다. 며칠 새 확 늙은 기분이다. 거짓말 같은 날씨, 마치 더는 읽을 만한 흥미로운 글이 없어 스스로 쓰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새로 술병의 목을 딴다. 번지를 잃어버린 삼덕동, 봄이면 그곳에도 연분홍 연분이 피어나겠지. 더운 흙은 제 기운을 못 이길 테고, 더는 갈 길 없는 너도 새봄을 핑계로 다하지 않은 꿈을 접었노라 우기기 좋을 테다.

오랜 핑계

비가 내리니 네 마음 잠시 엿볼 요량으로 술병을 연다. 취기가 오르기 전에 그치면 어쩌나, 잔을 드는 손보다 마음이 바쁘다. 늘 그렇듯, 네 마음은 잘 보이지 않고 너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인간을 사랑하기는 어렵다고 했던가. 지구가 아름답지 않아도 우주는 아름다운 법. 이생이 비루하고 남루할지라도, 저생을 위해 손과 손에 붉은 실을 이을 일이다.

오늘은 모처럼 너를 만난다. 흐린 기억 가운데 또렷한 눈동자 하나.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춘몽 2

근교 어디 마당 조금 있는 집이면 좋겠다. 멀리 시외버스라도 한두 대 다니고 번잡한 마을이 아니면, 닭 몇 마리 키우고 한 두어 평 텃밭 정도는 가꿀 수 있을 게다. 어느 바람결에 가련한 소식이 전해지면 가끔, 아주 가끔 마누라나 첫사랑들이 제가끔 비린 생선이나 누린 고기를 손에 들고 찾아 주리라. 되는대로 뒹굴고 뒹굴다 다만 그날을 위해 됫병 소주로 술이나 담글 일이다. 하늘가에 한 줄 예쁜 문장이 걸리면 큰대자로 나자빠지기나 할 일이다. 늙을 뿐 병들거나 목숨이 다하지 않는 세상에서 말린 생선과 고기나 배불리 나눠 먹을 일이다.

바람아 불어라

겨우내 밤을 웅크려 짐승처럼 세상을 궁리하였다. 짧은 겨울잠인 듯, 긴 낮잠인 듯, 휑한 몰골에 두드러기만 남았다. 궁리한 세상이야 유통 기한 지난 필름처럼 기다림도 잊고 다만 거기 술집 어느 모퉁이에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아침 출근길, 사무실 앞 매화 석 점이 바람 속에 불꽃 같은 망울을 터뜨렸다. 다음은 조동진의 불꽃.

바람아 불어라 가만가만 불어라 나뭇잎 쌓이는
님 떠난 그 자리에 한 줄기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자
바람아 불어라 가만가만 불어라 작은 새 날아라
해 저문 하늘 높이 한 줄기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자
나는 보았네 사랑과 미움을 나는 보았네 저 불꽃 속에
나는 보았네 슬픔과 기쁨을 나는 보았네 저 불꽃 속에

* 반상사유, 2월 15일부터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6회 지역영재 입단대회 참가를 끝으로 프로기사의 꿈을 접었다. 연착륙을 위한 서로의 약속을 지키는 것. 저나 나나 어찌 아쉬움이 없으랴만 나로서는 홀가분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아무렴, 아마추어가 진짜다.

민들레처럼 2

다음 먹을 술을 당겨 먹었다. 쥐죽은듯 조용히, 세상을 살짝 들었다 놓았다. 민들레처럼, 민들레처럼. 빈 의자에 네가 문득 나타났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 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치며 살아야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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