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

해마다 봄이면 생각날 거야.
어쩌면 오래 미뤄도 좋겠다.

꽃구경에 대한 심사를 이렇게 두 줄 써놓고 두 주 가량이 지났다. 4월 16일 전후로 무얼 더 쓰기가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드러낼 말은 아니지만, 새삼 누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나방이 나비를 본 것 같은 날이 지난다. 거인의 꿈에 나는 그저 꿈틀거리는 한 마리 송충이일 뿐이다.

일찍 찾아온 봄이 유난히 궂은 날씨를 보이더니 서둘러 물러가나 보다. 너를 만나 무얼 했는지는 몰라도 다시 꽃처럼 찾아올 걸 안다. 마주앉아 나눈 꿈같은 얘기 그날로 다 잊어도 마주할 날을 기억하듯이. 그래, 세상 구경이 너를 보는 것만 하랴. 다채로운 봄날, 나를 보고 너를 본다. 버즘나무도 새잎은 저리 예쁜데, 살아있는 게 이리 수상하다.

서연이가 5월 30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44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 바둑 초등부 남자 단체전 대구 대표로 선발되었다(바둑은 올해 처음 정식 종목이 되었고, 단체전으로만 치른다). 4월 5일 시민체육관에서 열린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다니는 학교에 현수막도 걸렸다. 막상 저는 그리 소원하던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도 기쁜 내색이 별로 없던데, 아비는 자식 이름자가 박힌 거라고 지날 때면 매번 처음 보는 듯 쳐다보곤 한다. 날로 녀석을 읽을 일이 아득해져만 간다.

타이젬 9단

서연이가 지난 3월 26일 처음 타이젬 9단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내리 3패를 하였지만 이튿날엔 첫 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6단에서 7단 갈 때 한 번 미끄러지고 7단에서 8단 갈 때 두 번 미끄러졌으니 딱 서너 번 정도만 미끄러지고 안착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새 벚꽃도 피었더니만, 봄은 봄인 모양이다. 술 먹고 돌아다니다 어디서 체체파리한테라도 물린 듯 휴일 한낮 내내 졸다 깨다 자다 깨다 하였다. 0124님 없는 동안 세 부자의 하루하루가 길었던가. 자주 술 퍼먹는 와중에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깨더니 쌓인 피로가 컸던 지도 모르겠다.

봄날 하루

김윤아의 이상한 이야기와 비밀의 정원을 반복해 들었다. 어린 시절 본 티브이 인형극 주제가의 애달픈 곡조를 닮았다. 그 곡조가 김윤아의 신 내린 목소리를 만나 늦은 바람처럼 사람을 흔든다. 늦은 바람이 흔든다고 흔들릴까만, 좁은 견문에 새가슴이 무너질 땐 이렇게 속절없다.

가고 오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애당초 오고도 가지 않을 거라 믿지 않았다. 황사만 봄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다. 매화, 산수유에 이어 동백도 피고 목련도 피어 봄은 알록달록 사연이 많았다. 누구는 돌아서고 누구는 돌아서서 울었다. 봄밤이 싫어 내처 울기도 했다. 봄날 하루는 여름 여섯이요, 차마 겨울 열인 줄 진작 알겠다.

어느 봄날

어느 봄날의 그 언덕, 난간에 기대 오래 누운 운동장을 본다. 꿈꾸듯 새잎 돋는 나무들 사이로 개나리꽃빛 플레어스커트가 나를 향해 나풀거린다. 동그란 눈동자, 동그란 안경이 어제처럼 선연하다. 들꽃도 피었던가. 아직 일러 라일락은 피지 않았지만, 우리는 삼월도 사월이었고 사월도 오월이었다. 반지하 조그만 동방 창은 얼룩덜룩 페인트 자국으로 남았고, 시너 향은 가시지 않았다. 중도에 이르는 길목마다 자판기에서 나온 종이컵이 넘쳤고, 언덕에서는 막걸리 밴 야전상의들이 빨래처럼 나부끼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나비처럼 쪼그려 앉아 물 묻은 날개를 접었다. 꿀을 탐하듯 소주를 마시며 언뜻 먼 나중을 보았을까. 새하얀 봄날, 샛노란 플레어스커트와 이 언덕을 돌아볼 줄 알았을까.

블루베리 전정

근육을 써라. 관절과 뼈를 이용하라. 볕을 쬐고 염분을 섭취하라. 뇌를 움직여 몸을 이동하라. 시간을 붙잡고 공간을 장악하라. 너를 놓아라. 세포를 분열하고 꽃목을 꺾어 뿌리를 단절하라. 이면을 보라. 미래와 결별하고 과거를 분질러라. 반상에 돌을 놓듯 잔을 놓아라. 나를 차단하라. 수맥을 뚫고 천천히 길을 놓아라. 울고 싶을 때 울어라. 그리고 조용히 숨을 놓아라.

형법 제241조

1988년, 1학년 때의 일이다. 학내 농성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세 학번 이른 같은 과 4학년 형이 뜬금없이 간통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형은 무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배의 하나였고 학년 차이가 있어 자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던 터였다. 나는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여 법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라고 답했고, 그 형은 여성의 지위와 대우가 상대적으로 낮은 우리 사회의 여러 풍토와 여건을 이야기하며 약자에 대한 옹호를 들어 그 법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였다. 자유주의적인 내 성향을 우려하여 일부러 꺼낸 얘기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회 속의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나아가 사회적 참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야 어디 갔을까마는 실제 그 이후 어떤 사안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그 일의 사회적 맥락이나 힘의 관계 등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는 버릇이 들었었다.

헌법재판소가 1953년 제정되어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형법 제241조(간통)에 대하여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네 차례의 헌법재판에서 합헌으로 판단했다가 오늘 위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난 일이다. 물론 지금이라면, 아니 훨씬 이전에 그 형도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고 지금의 헌재와 같은 판단을 내렸으리라. 1905년 공포된 대한제국 형법대전이나 1912년 제정된 조선형사령에서는 유부녀의 간통만을 문제 삼았다 하니, 법률의 역사와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모처럼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 앞 화단의 매화가 곧 망울을 터뜨릴 모양이다. 계절은 다 같이 누리는 것이겠지만 모르긴 모르되 차리는 놈은 따로 있을 테다. 몰래 가만히 준비하는 놈도, 스미는 것도 다 따로 있을 테고.

서녘 비골

낮달 떴으니 낮술 한잔 먹는다. 어디서 북 소리, 방망이 소리, 꽝꽝 무언가 가르는 소리. 허망한 꿈을 꾸었구나. 동녘 운산, 북녘 눈뫼, 서녘 비골, 남녘 유리, 어디로든 떠나고픈 마음에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다시 펼쳤다가 비골에 한참 눈이 멎었다. 그렇지, “지렁이는 흙밑 습습한 곳에서라야 세상은 안온하다고 하는 것”이지.

바다가 있고, 산이 거기로 내려가다 발목만 잠그고 멈춰서 버린 저 비골에서는, 늘 젖고, 늘 울었지. 술에도 젖고, 생선 비린내에도 젖고, 계집 흘린 눈물에도 젖었더라구, 거기는 글쎄, 여덟 달간이나 비가 온다고 하잖던가? 남는 넉 달 중에서도, 청명한 날 찾기는 어려운데, 어쩌다 끼어드는 청명한 날은, 무슨 염병이나 간질병 같은 것이지. 그 여덟 달 동안의 젖은 바람은, 뼈마디마디에다 해풍과 습기와 관절염만을 불어넣는 것만은 아니라구 글쎄. 어떤 청명한 다음날에, 사람들은 자살을 해 버리지. 글쎄 어떤 사람들은, 무참히도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더라구. 비가 내리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줄기찬 법 없는, 저 습습하며 어두컴컴하고, 뼛속에 곰팡이가 피어 가는 저 모든 것을 상상해 보시란 말이지. 글쎄 겨울이란대도 혹독히 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가벼운 감기나 걸릴 정도인 것이며, 여름이란대도 무참히 더운 법 없어, 노숙 끝엔 한번 더 감기나 걸릴, 그런 고장의 저 음산한 거리며, 낮은 추녀 밑에는, 언제나 웅숭그리고 있는, 썩는 듯한 어두움이며, 헌 가구의 냄새며, 개까지도 웅숭그리고 지나며, 나뭇가지도 뼈를 아파해쌓는, 글쎄 그런 고장을 상상해 보란 말이지. 그런 어떤 날, 느닷없이, 하늘이 그냥, 푸르게 엎질러져 버리고, 길이며 지붕 꼭대기들이 아주 낯설게 뻔적이는 것이오. 거기서 또 떠났구료 나는 엥, 그것도 자살은 아니었을까 몰라. 젠장 떠난 건 떠난 거니껜.

낙하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서로를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로줄로만 투명한 집을 짓던 수거미가 잠시 쉬는 사이, 어딘가에 단단히 붙어 있던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가을날 잎사귀처럼 돌돌돌 굴렀다. 더는 누가 필요하지 않아도 돌아갈 집은 있어야지. 오롯이 제힘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사이에 두고 암거미가 끈적이는 가로줄을 거둬 모질게 제 몸에 감고 있었다.

안녕

말을 많이 한 날 밤은 공허하다. 그럴듯한 말을 한 날은 더욱 그렇다. 역시 덜 깬 상태가 덜 취한 상태를 능가한다. 멀리 있는 술집도 가지 않는 내가 오늘은 멀리 있는 너를 그린다. 지나는 문장마다 너를 생각하며 빼거나 더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온전히 내가 나였던 시절, 고스란히 나의 전부를 던졌던 그때. 철없이 겁도 없이 내닫다 내일도 없이 주저앉기도 했지만, 선홍의 꽃을 끝내 대궁 끝으로 밀어 올리기도 했다. 치열하게 울고 허무하게 지기도 했다. 세상을 버리고 너를 버리고 갈 일이 아득하다. 완벽주의자, 완벽한 현실주의자는 우울로 스스로를 버릴 수밖에 없다더라만,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기로 한다. 세상아, 너를 만나 즐거웠다. 취할 수 있어 좋았다. 기다려라. 이제 너에게 다른 세상을 알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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