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꿋꿋하게

서연이 학교에서 도시락 데이를 맞아 사랑의 편지나 메모를 함께 전해달라는 선생님의 요청이 있다하여 간밤에 급히 쓴 편지.

서연아. 너를 처음 만난 날과 처음 글자를 읽던 날을 기억한다. 홈스파월드 찜질방 한쪽, 처음 우리가 논쟁을 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 어린 나이에 의견이 맞서자 제 논리를 갖고 다투는 게 대견하기만 했다. 학교에 들어가 일학년이 되었을 때, 계명대학교 바우어관에서 처음으로 바둑대회를 우승하고 달려와 우승, 우승을 외치던 모습과 기차를 타고 문경까지 가서 일박한 날, 연이은 우승을 마감하고 품에 안겨 울던 너를 기억한다.

어디 너를 기억하는 것이 그뿐이겠는가. 섬세한 감정선에 반짝이는 촉을 가진 아이. 네가 기억 못할 어린 날, 너는 유독 점잖은 아이였다. 아빠의 어린 날을 한 번씩 돌아보다 보면 불현듯 나를 닮은 너를 만난다. 반갑고 기쁜 한편 아빠가 갖지 못한 깊고 너른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한단다.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교유, 그리고 상상도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할 것이다. 언제나 그것이 무엇이든 곱새기고 되돌아보며 꿈을 잃지 않길 빈다. 칼끝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것처럼 강한 자 앞에 당당하고, 너에게 손을 내밀듯 약한 자와 연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의 장점을 볼 줄 알고 언제나 겸허하며 나의 단점을 살피고 삼갈 줄 알아야겠다. 두루 친구를 만나되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를 가져야겠다.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날들과 그 사이 같은 어둠, 때로 달처럼 이지러지고 차오를 날들이 있을 거다. 네가 만날 미래가 부럽고 궁금하구나. 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고, 너를 믿는다. 건강하고 꿋꿋하게. 사랑한다, 서연아.

가을의 바람

늙었다기엔 젊고 젊다기엔 늙었구나. 늙은 체 하기엔 아쉽고 젊은 체 하기엔 마음이 이미 따르지 않는다. 어느새 가을이라 가을의 바람이 불고 민달팽이도 제 집을 찾는다. 먹을 것을 잃고 검은 새는 길을 떠난다. 전신주가 기우뚱 수직을 눕혀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해는 다시 뜨지 않을 것처럼 그 끝에 걸렸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풍경이 흔들리고 세상도 한 살 더 먹는다. 저도 갈 길 없이 늙었으리라. 그날부터다. 낮에도 네 그림자가 길다.

지난 세기

다시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고 검은 새가 도시를 선회한다. 길 끝으로 길을 불러 지난날을 노래한다. 지난 세기를 보낸 사람은 다음 세기를 맞지 못한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선생님. 취한 사내가 세계를 잠시 흔든다. 불길한 계집과 주인 잃은 거미집이 그림자처럼 떤다. 달이 뜨고 사랑이 진다. 젖은 사내는 오늘 거미집에 계집 같은 잠을 청할 게다. 나도 길 끝에서 술을 얻고 옛 노래를 들어야지. 돌아오는 길에는 낯선 길이 길게 이어질 테다. 나에게도 불안한 계집처럼 불길한 사랑이 깃들 테다. 아무렴, 검은 새가 곤두박질치고 바람이 바람을 불러 함께 운다.

칠석

흐리고 비가 온다. 나는 담배 연기를 내뿜어 흐림을 더한다. 술을 불러 너를 만난다. 잊지 않을 것이다. 술을 부르던 너나 네 이웃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의 이웃을. 비가 내리고, 너를 피하고, 내가 눕던 날. 그렇게 먼산에 나도 눈이 멀었다.

입추

여름이 가고 있다. 어느 마음처럼, 짧은 매미의 일생처럼 덧없이 가고 있다. 며칠 아이의 생애와 나의 어린 날을 생각했다. 만남과 인연에 대해, 남은 날들에 대해 오래 돌아보았다. 어제는 바짝 마른 하늘에 천둥이 꼭 그렇게 울었다. 제 덩치의 몇 백배 되는 꽃매미 사체를 끌고 가던 개미와 음악당의 뜨거운 백색 시멘트 벽에 껍질로만 남은 달팽이를 떠올렸다. 거기 노랗게 피었던 개나리 무리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름이 가고 있었고, 앞날을 예감한 듯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하였다. 봄이나 겨울 따위 더는 모를 일이었다.

절명을 기다리듯

몸에서 살 썩는 냄새가 난다. 알코올을 그리 들이부었건만. 그래, 이대로가 좋은 거다. 아쉬움도 그대로 두고, 그리움도 접어 두고.

다음은 최하림의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전문.

우리는 많은 길을 걸었습니다 아침이면 등산화 끈을 질끈 조여매고, 여름 햇살을 등지고 월령산을 넘어 꽃무덤에 이른 때도 있었고, 덕유산 아래 갈마동에서 눈이 내리는 저녁을 보는 때도 있었습니다 12월이 지나고 1월이 오면 중북부 지방에는 복수초들이 눈 속에 솟아오른다지만, 우리는 겨울 내내 방 안에 박혀 티브이만 보았습니다 다시 봄이 다가와 돌담 아래 민들레꽃이 피어날 때에야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와 실크 머플러와도 같은 햇빛을 목에 두르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강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거나 바람이거나 햇빛처럼 반짝였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수많은 모세 혈관들이 입을 열고 햇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버들강생이들도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폭포수와도 같은 소용돌이가 일었습니다 어떤 것도 정지하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 변화를 뭐라 말해야 할까요? 내가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나는 뒤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내가 뒤돌아보며 감정의 굽이를 돌아갈 때, 그대 모습은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일상

요 며칠 출근 준비를 하거나 일을 하다가도 문득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즐겁게, 누구랄 것 없이 사이좋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전날이나 전전날 술이 덜 깬 영향도 있을 것이고, 최근 일상 같지 않은 날이 많아 더 그럴 것이다. 일터에 몇 년 만의 큰일이 있었고, 장조모께서 돌아가셨으며, 나라에는 이름이 무색한 전염병이 돌아 주변이 흉흉하다. 사람 사는 일이 한결같을 수야 없겠지만, 일상으로 살다가 일상처럼 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서연이는 제44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바둑 종목 참가로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제주도에 다녀왔다. 16강부터 시작하는 단체전 경기, 대구 남자 초등 대표팀은 대진 운이 비교적 좋았으나 8강에 머물고 말았다. 그래도 저는 상대팀 1장하고만 맞붙어 2승을 하였으니 아쉬운 대로 만족할 만 하였다. 남은 시간에는 같은 학교 선수가 참가한 탁구팀을 응원하고, 성산포와 정방폭포를 둘러보고 온 모양이다. 용돈 갖고 간 걸 오로지 제 동생과 식구들 선물 사는 데 쓰고 비행기 연착으로 한밤중에 돌아온 녀석을 보고는 모처럼 아비의 시린 마음을 느끼기도 하였다.

춘몽

그만하면 봄날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낮 기온이 삼십 도를 오르내린 전날이나 다음날의 꼭 절반이었다. 일기예보를 비웃듯 종일 비가 내렸고, 기상청은 날씨를 중계하기에도 벅차 보였다. 못다 간 봄이 남긴 차마 마지막 봄밤인 듯 나는 애가 달았다. 오래된 어느 모퉁이, 기품과 위엄을 잃지 않고 이미 홀로 선 나무를 보았다. 잠시 흔들리던 물빛 줄기와 단단한 뿌리를 보았다. 아무렇게나 기대 그저 같이 흔들리고만 싶었다. 오래 흔들고도 싶었다. 가지 하나쯤 아무도 몰래 꺾고만 싶었다. 다음 세상일랑 없답니다. 살아서 다시 만나요. 계절은 감당할 것만 감당하였고, 가만히 가야금 섞인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밤이 저물고 있었다.

어린이날

어린이날, 서율이는 0124님이랑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이이팔기념중앙공원, 진골목 등지에서 놀고, 서연이는 나와 함께 새벽부터 서둘러 서울 방이동 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제4회 일요신문배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 참가하였다. 조별 예선 리그와 본선 토너먼트로 펼쳐진 최강부 경기. 3승으로 비교적 가볍게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 첫 경기인 16강전에서 지난 열린바다배 첫 상대이자 그 대회 우승자와 맞붙어 반집 승을 거두었다. 굵직한 전국대회에서 이제야 성적을 좀 내보나 하는 기대를 가졌으나, 이어진 8강전에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공교롭게도 8강전 상대 역시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돌아오는 길, 네가 우승 제조기로구나, 농을 하였다). 멀리서 표정이나 몸짓으로 형세를 짐작하며 한 수 한 수에 긴장하다 보면 늘 이게 참 할 짓이 못 된다 싶은데 오늘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지켜보는 사람이 이럴진대 막상 승부를 가리는 저야 오죽할까만, 글쎄 어리고 여리기가 아비 같기야 할까 싶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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