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 꽃 피는

작은 패배가 다른 패배를 부른다. 작은 패배들이 모여 큰 패배를 이룬다. 패배는 또한 승리를 부른다. 작은 패배들이 모여 큰 승리를 이룬다.

아이야, 내가 너에게 주고 싶은 것은 이따위 죽은 말들이 아니었다. 고작 그 작은 코에서 나는 코피를 닦아주고 휴지로 입구를 막아 그걸 멎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손길은 불 꺼진 어둠 속에서도 너를 선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마이너스 구 디옵터를 바라보는 도수로도 밝힐 수 없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네가 그 작은 승부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걸 보았다. 만회하고 뒤집히고 다시 뒤집는 걸 감전된 몸뚱이로 꼼짝없이 지켜보았다. 두 번의 긴 승부를 마치고 곧장 세 번째 승부를 가릴 때 나는 상기된 얼굴을 식히러 잠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낙관적이던 초반 형세는 그새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 되어 있었고, 내 마음은 회한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아이야, 내가 너를 만난 건 내가 나를 만난 것보다 오래 되었다.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배우고 사랑의 실체를 알았다. 사랑하는 아이야, 내가 너를 안 건 네가 나를 안 것에 미치지 못한다. 애써 가여운 나를 위로하지 마라. 너를 내가 닮고 싶구나.

아까시 꽃 피는 더운 거리를 횡단하던, 너도 나도 누군지 모르는 시절이 문득 그립다,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최후는 그렇게

사람이란 게 곧 죽어도 먹어야 할 땐 먹어야 하는 거다(먹다 보니 든 생각이고 그래서 정당한 얘기이지만, 뭐 그렇다고 먹어야 할 때 먹지 않는 놈이나 먹지 않아야 할 때 먹는 놈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야 할 때엔 가는 것이고 살아야 할 때에는 사는 것이다. 그게 정답이다. 곧 죽을 줄 알면서 먹는 것처럼 설령 그게 골로 가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최후는 그렇게 오는 것이고, 그래서 최후의 최후는 아름다운 것이다. 바둑돌 던지듯 그렇게 던지는 것이다. 돌을 거두듯 슬그머니 그렇게 목숨도 거두는 것이다. 암만.

Plants vs Zombies

서연이가 방과 후 컴퓨터 교실에서 받아온 ‘식물 대 좀비’, 그야말로 재미있고 중독성이 강해 지난 명절 혼자 집에서 장난삼아 만졌다가 이틀 날밤을 꼴딱 새기도 하였다. 지혜의 나무를 1,000피트 이상 키우지는 못했지만, 거의 모든 과업을 완수한 듯. 두어 달 서연이와 나를 붙잡은 기념으로 기록을 남겨둔다.

* 지혜의 나무가 일러 주는 치트키는 future, mustache, tricked out, sukhbir, 그리고 daisies(100피트), dance(500피트), pinata(1,000피트). 이것 때문에 언젠가 1,000피트 넘게 키울지도 모르겠다.

진광불휘

잃어버린 걸 찾던 때가 있었다. 먼 미래의 어느 날처럼 아스라한 그때, 이미 나는 한번 죽었다. 지난겨울엔 많은 눈이 내렸고, 가슴에는 묻는 것이 많아졌다. 오래 추웠고 지칠 무렵 찾아온 온기가 문득 반가웠지만, 꽃샘추위는 동병상련인양 밉지 않았다. 진광불휘(眞光不輝) 네 글자를 며칠 붙들고 있다가 황지우를 다시 만났다. 그의 말처럼 어느 날 나는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흐린 주점에 앉아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보게 될까. 그날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삼월은 삼월인가, 오늘은 낮부터 자꾸만 졸린다.

우화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토끼가 달렸어. 자기 굴 다섯 번째 입구를 머리 속에 떠올리고 말이야. 마음에는 다섯 개의 별을 그렸지. 세상의 비밀을 이제 슬쩍 엿보았을 뿐인데, 간밤에도 몇 차례 달이 지고 너구리 굴에 잠자던 낙엽은 하늘로 올랐지. 때가 된 건가, 눈밭을 헤치던 토끼는 아가위 붉은 열매도 지나치고 추상같은 전령도 지나쳤어. 까무룩 잠이 들었나, 술이 달더라니, 환약 같은 기억들을 검게 내지르고 토끼는 그예 길게 눕고 말았대.

새로 튼 둥지에서도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도 철이고 멀어도 갈 길은 가야 하는 것을, 남은 생과 지나온 자국이 칼바람에 살갗을 에는 양 마냥 시리다. 세상엔 머지않아 다시, 봄이 오고 꽃이 필 테지. 사이나 먹은 붉은 열매 같은 것이 목에 걸린다.

마디마디

매번 두려움에 떨면서도 폭음과 시체놀이를 번갈아 하다보니 얼굴도 어딘가 모르게 좀비를 닮아가고 있다. 어제는 모처럼 얼굴을 맞댄 대학 동기들 송년회 자리에서 꼬박 여섯 시간을 한자리에만 앉아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쓰린 속이 풀리면서 오랜 초조와 우울도 서서히 풀리는 것만 같았다. 거점과 지향에 대한 고민, 무시로 시공을 넘나들다 이차로 옮긴 자리에서 송아지의 한마디가 번갯불처럼 와 닿았다. 잊어버릴까 싶어 메모지를 얻어 적어두었다.

전선에 선 사람은 틀리게 마련이다. 마치 링 위에 오른 선수처럼.

그래, 이맘때를 기억해 두자. 돌이킬 수 없고 돌아오지 않을 빌어먹을 육 개월, 마디마디 깊숙이 새겨두자. 다음은 신석초의 바리춤 서사 첫 연.

묻히리란다. 청산에 묻히리란다. / 청산이야 변할 리 없어라. / 내 몸 언제나 꺾이지 않을 무구한 / 꽃이언만 / 깊은 절 속에 덧없이 시들어지느니 / 생각하면 갈갈이 찢어지는 내 맘 / 서러 어찌하리라.

1박 2일

어제, 그제 문경에 다녀왔다. 제5회 문경새재배 전국 아마바둑대회 대경초등 저학년부 참가를 이유로 서연이랑 둘이 떠난 여행이다. 대경초등부 경기는 일요일 오전에 시작하지만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하루 일찍 출발하였다. 좀 먼 길에는 기차만 고집하다보니 뜻하지 않은 일들도 생긴다. 몰랐는데 가는 기차는 네 량짜리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였다. 차량 내외는 온통 울긋불긋하였고, 무슨 이벤트 열차인가 한다고 경주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아주머니와 애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좀 있자니 각각의 연령에 맞춘답시고 남행열차부터 은하철도 999까지 아마추어 가수의 라이브 공연도 펼쳐졌다. 점촌역사는 아기자기하면서 여기저기 손댄 정성이 예뻐 보였다.

예약한 숙소 근처에서 한우 모듬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아마 최강부, 학생부 등 낮부터 열리는 대회를 둘러보았다. 부산의 천재로 알려진 초등학교 4학년생 신진서 군(올해 대한생명배 우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대회뿐만 아니라 올해 열린 전국 초등학생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하였다고 한다. 전문학원에 다니지 않고 특별한 개인 지도 없이 독학으로 이룬 성과라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대회에서는 아마 최강부에 출전하여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16강까지 올랐다)의 차분하고 또랑또랑한 얼굴과 서늘한 손매가 기억에 남는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고등학생 형을 열심히 응원한 서연이는 이날 현장에서 신청하여 이상훈 9단과 지도 다면기를 가지기도 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서연이는 16강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대진 추첨 운도 따르지 않은 것이 상대는 작년에 준우승을 하고 이번에 같은 부에 출전하여 우승을 하였다). 올해 내가 함께한 경기로는 지난 4월 첫 우승한 대회의 예선전에서 한 번 진 후 첫 패배인데, 그날 우승하고 달려와 안긴 후 처음으로 달려와 안기기도 하였다. 습한 온기가 잔뜩 전해지면서 나는 그저 잘했어, 잘했어 다독이는 손에 힘만 들어갔다. 16강까지 감투상을 수여하여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3만원을 받았는데, 그동안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 상금 넣는 걸 꽤나 즐기던 녀석이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는, 이번엔 아빠 하세요, 낮게 얘기하였다. 간밤에는 피곤하다며 그림일기 숙제도 하지 않고 저 먼저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이 들더니, 겉으로는 몰라도 저도 속은 안 좋았던 모양이다.

1박 2일 동안 영화를 네 편 보았다. 숙소에서 밤에는 원티드, 아침에는 터미네이터를 보았고, 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역 근처 DVD방에서 내니맥피 2와 전우치를 달아서 보았다. DVD방에서는 유독 큰 소리로 깔깔대더니 나올 때는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까지 상상 속으로 자꾸만 날아다니던 녀석이 어째 애처롭기도 하였다.

도랑물 소리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 더는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술이라도 끊어 볼 일이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아 다른 생각만 하였다. 펄펄 날아다니던 것들은 그날 그것이 아니었다. 묵은 사진이 이야기하는 것이 묵은 시절에 대한 게 아닌 것처럼, 지나간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낙엽은 재빨리 움츠리라는 명령,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대 목소리, 어린 체구가 하늘 건너듯 건넌 도랑물 소리보다 멀다.

바둑 2

어제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에서 열린 제28회 덕영배 아마대왕전 어린이 부문 예선 겸 2010 어린이 바둑 큰잔치에서 서연이가 1학년부 1위를 차지하며 이번 주 토요일 덕영치과병원에서 열리는 본선에 진출하였다. 8강이 겨루는 이번 본선에서 우승을 한다면 지난 4월 25일 대구광역시바둑협회 초등연맹장배 학생바둑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대구에서 열리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다. 2학년부터는 우승을 하면 통상 상급 단증을 주니 내년에는 아마도 유단자부에서 자주 대회를 치를 터이다.

월간 바둑을 보다 보면 대구의 바둑 교육에 대해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실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거기 실린 자료로만 보자면 대구의 바둑교실 수는 타 시도에 비해 상당히 많은 편이나 방과후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나온다. 서울은 65개교, 경기도는 112개교, 대전이 57개교, 부산이 46개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말이다. 한편으로 인천, 전라남도, 강원도가 각 2개교씩 운영하고 있어 별나게 유난을 떨 일은 아니겠지만 경상북도와 더불어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어째 좀 씁쓸하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바람보다 잘 흔들리는 아비를 굳게 잡아준 두 아들에게는 미움보다 큰 빚을 졌다.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바다.

* 좀 전 셔츠를 다리다 주머니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뭉치를 발견하였다. 부피를 보아도 그렇고 셔츠 주머니에 있은 걸로 봐도 그렇고 간단한 메모나 어디 술집 전표이거나 할 터인데 도통 기억이 없다. 기억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잠시나마 궁금하지도 않더니 문득 이렇게 늙어가나, 움켜쥘 어떤 것들도 그저 이렇게 가버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디오에서는 엄마야 누나야, 오빠 생각이 경음악으로 구슬프게 흘러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음악에게도 많은 빚을 졌다. 아, 그리고 당신에게도. 물론 되갚을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누군가는 그저 받아먹기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암만.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