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일기 2

어제 저녁 공짜표가 있어 엑스코 컨벤션홀에서 열린 생명존중 감성치유 콘서트를 보았다. 하루 연차를 낸 0124님, 서율이와 함께 이시아폴리스에 잠시 들렀다가 제32회 덕영배 전국아마대왕전 및 2014 덕영바둑축제에서 지역 연구생 교류전을 마친 서연이를 데리고 간 자리. 마술 공연에 이어 가수 션의 강연, 그리고 아이돌 그룹의 공연으로 이어지는 무대였다. 마술 공연에서 다들 유쾌하게 웃고 션의 강연에서 각자 눈시울을 훔치고는 아이돌 그룹의 공연 중간에 자리를 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근 봉봉해물탕에서 반주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소주가 맑았다.

오늘은 오후 늦게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가는 길에 어릴 때 들었던 카세트 테이프로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들었다. 힘을 잃은 햇살이 문득 비치는 사이로 옛일, 옛사람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들이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살아있는 게 느껴졌다. 구름이 흩어지다 뭉쳐서는 색깔을 바꾸었다. 휴일 코스트코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돌아온 저녁, 스테이크를 구워 먹다 가장 입에 맞는 맥주를 찾았다. 반갑다, 칭타오.

꿈길

꿈길을 걸었다. 갈잎 가득 깔린 길. 오래 아문 아가미가 아렸다. 더러 따라 돌던 덧난 데가 덧터졌다. 무교는 나의 종교. 바람은 너의 노래. 신문지에서 활자가 떨어져 제멋대로 글자를 만들었다. 주워 담는 손이 뭉툭하여 애처로웠다. 황량한 마음에는 지킬 것이 없었고, 불에 덴 자국은 아프지 않았다. 끊어진 꿈길, 낭떠러지 아래는 벼랑이었다.

* 신호를 감지하고, 형식만 바꾸었으면 하고 바랐다. 크게 노력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고, 다만 하던 대로 안타까운 마음만 다스리면 될 일이었다. 내용까지 바꾸고자 하는 그 마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처음 일치보다 위험해 보였다. 가장 안전한 위험. 어차피 낮은 수준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는 관계, 서로의 불일치는 안전도, 위험도 깨끗하게 제거해 버렸다. 그런 시간이었다.

매화산

어제 단체로 매화산에 올랐다. 산 아래는 단풍이 절정이었고, 산은 구름 속에 있었다. 중턱에서 만난 구름 속 풍경이 좋아 한참 머물다 혼자 내려오는 길, 구름이 내내 따라 내려왔다. 계곡물 흐르는 소리, 잎 지는 소리가 딴 세상을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모든 잎들이 꽃보다 아름다운 두 번째 계절’, 몇 잔 술에 그걸 이해 못했을꼬. 천지사방 온통 하얀 세상은 그대로 어떤 얼굴이었다.

생일

단번에 무너질 줄 몰랐다. 그렇게 저릴 가슴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겨우 지탱하고 있었던 게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한 번쯤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오래도록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늘 아른거리던 것이 신기루 마냥 나타났다 사라졌다. 밤새 어느 구석에 적어 놓은 문장 하나가 맴돌았다.

일터의 웃어른께서 영면에 드셨다. 생전의 영상을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였다. 더 좋은 세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 시름은 다 내려놓고 편히 가셨으리라 믿는다. 서연이는 처음으로 제 용돈을 모아 향수를 선물했다. 카드에 쓴 ‘아버지를 응원하는 아들’에 마음이 뭉클했다. 이래저래 잊지 못할 생일이 되었다.

영천 유람

연휴 중 이틀을 영천 일대에서 놀다 왔다. 치산관광지 캠핑장을 0124님이 예약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잡힌 일정이었다. 예약이 그리 어렵다는데 누군가 취소한 걸 용케 잡은 모양이다. 대원이(서율이에게는 레고 삼촌 또는 뚱뚱보 삼촌)에게 숯과 토치를 빌리고, 소고기 등심에 삼겹살, 새우, 막창 등을 장만하여 가족 여행 기분을 냈다. 혼자서는 처음으로 숯불을 피워 보았는데 역시 불을 가지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서연이는 계곡물에서 다슬기를 잡는 것에만 신이 났고, 서율이는 낯선 환경과 여러 먹을거리를 즐겼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구름 사이로 꽤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이튿날에는 은해사와 사일온천에 들렀다가 편대장 영화식당 본점에서 육회비빔밥을 먹었다. 은해사는 처음 가보았는데 절은 모르겠으나 울창하고 넓은 진입로가 좋았다. 주변에 오래된 참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아이들이랑 경쟁하듯 꽤 많은 도토리를 주웠다. 애들이 하도 좋아해 굳이 하룻밤 묵지 않더라도 종종 이렇게 채집할 수 있는 나들이를 하면 좋겠단 생각을 하였다. 돌아와서는 잡아온 다슬기를 키우기 위해 장독 뚜껑에다 돌멩이 몇 개를 넣어 집을 만들어 주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또 군식구가 늘었다.

대회 참가 일지

서연이의 올해 대회 참가 일지. 타이젬 8단에서 두 번 미끄러지고 7단에서 정진 중. 다른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언제까지 이 길을 갈 수 있을까. 정답 없는 고민이지만 결론이 해답일 터.

2월 23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2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2조 23위(2승 3패)
3월 21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3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2조 27위(1승 4패)
4월 13일, 고성동 시민체육관, 제6회 대구시장배 시민 바둑대회 최강자부 8강
5월 11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 제3회 일요신문배 전국어린이바둑대회 최강부 예선탈락(1승 2패)
5월 18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5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3조 7위(3승 2패)
6월 22일, 군포 흥진초등학교, 제206회 한바연 학생 바둑대회 2조 24위(2승 3패)
7월 13일, 계명대학교 바우어관, 제14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대구지역 예선 국수부 1위
7월 19일, 포항 실내체육관, 제6회 영일만사랑배 전국 바둑대회 경북최강자부 우승
8월 3~6일, 공주 백제체육관, 2014 무령왕배 세계청소년바둑축제 초등최강부 공동우승
8월 7일, 서울 63빌딩 별관 그랜드볼룸, 제14회 한화생명배 세계어린이국수전 국수부 2승 3패

동면을 위하여

겨울은 또 어찌 나려고,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간다. 더는 술 먹고 고꾸라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하리라, 까르르 웃는 두 아이와 성실한 아내를 시체처럼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먹는다. 꿈이 무엇이고 인연이 무엇인가. 알량한 것 하나만 품고 멀리도 왔다. 덜어낸다며 채우고 채운다며 덜기도 했겠지. 난 체는 오죽했으랴. 중독된 시간만큼 해독에 시간이 필요할까. 그러고 나면 레고 장난감처럼 산산이 부서뜨려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아이처럼 기껏 만들어놓은 걸 별일 아니라는 듯 간단히 해체하고 다른 걸 구상할 수 있을까. 지난날이 이리 어렴풋한데 분명한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밤이 깊으면 별은 더 반짝이고 새벽이 가깝다는데, 엊그제 고꾸라지기 전에 올려다본 하늘에서는 별이 제 운명을 노래하고 있었다. 땅에 발이 닿지 않는 나는 터져 나오는 노래를 억누르고 쥐며느리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방앗간 전선 위의 참새

헐하고 허름한, 공중부양으로 하루를 견딘 우리가 지친 해를 위로하는 저녁,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농담, 흘러간 가락에 비틀거리는 술잔, 무너지는 마음, 오지 않을 사람, 가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욕망, 중독처럼 피어나는 열꽃, 회한과 미련, 적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처럼, 부서지는 운명처럼, 주인을 닮은 술집.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며칠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굴곡 없이 편하게 살아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새옹지마 같은 세상, 모쪼록 전화위복이 되기를.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없는 갓끈도 고쳐 매지 않기를. 종일 비가 내린 하루, 방앗간 전선 위로 간다.

천천히

어딘가 단절된 곳에서 한 몇 년, 적게 먹고 조금 걷고 그저 숨만 쉬다 왔으면 좋겠다. 비라도 주르륵 내리는 날이면 냉큼 무언지 모르는 것이 그리워 술이라도 찾아 힐끔거리겠지. 더러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어름이면 큰아이는 기리를 깨쳐 대성하여 있을까. 다른 길을 찾아 새로운 세상을 연마하고 있을까. 재롱 많은 작은아이는 어떤 사람을 만나 세상을 알아가고 있을까.

지난 주말이었다. 마른장마의 막바지, 구룡포읍 구평리 해변에서 짙은 해무와 차가운 바람을 맞는 호사를 누렸다. 해무가 맺혀 솔가지에서 물방울이 들을 정도였다. 분위기를 주체 못하고 밤새 주도삼매에 들던 중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족히 십오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지네에게 오른발 발가락을 물렸다. 일행에게 잡혀 변기통으로 사라진 주황빛 지네는 불로 지지는 듯, 가시로 찌르는 듯 꼬박 두 시간을 그렇게 아프게 하더니 물린 사람을 술 마시기 전의 몸뚱이로 만들어 놓았다. 열네 명이 정오부터 다음날 오후 서너 시까지 내달린 와중에 가장 많이 마시고도 가장 멀쩡할 수 있었던 건 다 그놈 덕분이었으리라. 뒤에 생각하니 그렇게 황천으로 보낼 일은 아니었다. 바닥을 잘 살펴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제가 먼저 해코지하기야 하였겠는가. 길을 잘못 찾아든 제 탓도 없다 할 순 없겠다만, 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새로운 질서가 온다고 한다. 천천히, 나는 나의 질서를 지킬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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