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꿈

from text 2026/01/01 09:06
처음 제식을 만든 이들과 처음 예식을 행하던 이들, 열과 빛을 나누고 소리 없는 명령을 이행하던 그들, 허무를 감당하는 영혼들처럼 그렇게, 꿈을 꾸는 자, 열매를 품은 씨앗, 눈밭에 쓰러진 토끼, 목매단 꿩, 나무를 닮은 닭들과 함께, 복권 없는 당첨을 바라며, 과거로, 우주로, 기억으로 기억을 지우고 망각을 망각으로 대체하며, 먼지처럼 흩어질 자 누구인가. 어제 같은 해가 뜨고 어제처럼 한 세계가 진다.

먼길

from text 2025/12/02 19:48
꿈을 꾼 걸 보니 잠을 잔 게로구나. 오래 헤맸으니 오래 머무렴. 호랑가시나무 새빨간 열매, 오래 걷고 오래 견딘 저 피로를 보렴. 잎맥에서 길을 찾았느니 떡갈나무 너른 품이 좋아라. 에헤야, 간단다 간단다 저리 저멀리.

그래, 지고 가야 할 것이 있고 두고 가야 할 것도 있겠지. 다음은 목성균의 수필 새벽 등산 첫 문단. 그러고 보니 새벽에 산에 오른 적이 없구나. 날이 좀 좋아지면 꼭 한번 올라 행렬을 함께하리라.

새벽 산에 올라가서 자고 난 맑은 눈으로 날 새는 건너 산을 보면 먼길 떠나는 나무들의 행렬이 보인다. 나무들은 곁에서 보면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먼길을 와서 먼길을 빙하처럼 아주 천천히 산을 통째로 밀고 간다. 그건 욕계(欲界)가 깨어나기 전, 신새벽에나 볼 수 있다. 밝아 오는 산등성이의 나무를 보면 비로소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길은 단숨에 달려가려는 자발적인 출발의 가까운 길이 아니다. 묵묵히 댓돌에 앉아서 한참 동안 마음을 모아 신들메를 매고 비로소 천천히 무겁게 일어나서 사립을 나서는 남자의 굽힘 없는 의지 같은 아주 먼길이다. 서두르지도 않고 망설이지도 않고 평생 동안 가야 할 먼길. 날 새는 건너편 산등성일 건너다보면 나무의 가는 길이 보인다.

가을산

from text 2025/11/01 14:28
노랗거나 붉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는 감나무를 보다 문득 어린 시절 감꽃을 실에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서 주던 여자아이 생각이 났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소년의 새처럼 작은 가슴과 함께 문득 생각이 났다. 아침에 산을 찾아 걷다 가을산이 생멸하는 모든 것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을 빌려 우우 우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늘 거기 있던 겨울산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송찬호의 만년필 전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