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from text 2025/11/01 14:28
노랗거나 붉게 물든 잎을 떨어뜨리는 감나무를 보다 문득 어린 시절 감꽃을 실에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서 주던 여자아이 생각이 났다.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그 마음이 소년의 새처럼 작은 가슴과 함께 문득 생각이 났다. 아침에 산을 찾아 걷다 가을산이 생멸하는 모든 것들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을 빌려 우우 우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늘 거기 있던 겨울산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송찬호의 만년필 전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울산대왕암

from text 2025/10/19 11:30
높은 압력에는 낮은 힘으로 오래 맞설 일, 밤이 되면 나무와 나무 사이 섬에서 근본을 생각하는 새처럼 이미 사라진 것들을 위해 목을 놓아 우노라. 저 길은 그해 지나온 길, 운행을 멈추고 질서를 궁리하는 어느 별처럼 하릴없이 공배를 메우며 다시 길을 가노라.

유난히 흐리고 비가 잦은 가을이다. 어제 단체로 울산대왕암에 다녀왔다. 자의왕후를 잠시, 그리고 오래 지난날을 생각하였다. 석 잔에 그친 감회가 따사롭다.

울울창창 푸른 바다에
산금의 노래 드높구나
대왕의 길을 가는 이 누구인가
왕후의 넋이 애닯도다
암릉에 서린 날들이 내일을 말하리라

가을이 오고

from text 2025/09/28 20:02
새 막이 오르듯 가을이 오고 청춘이 간다. 먼일을 생각하며 뜨거운 세월을 욕조에 가두고 탄산수에 위스키 풀 듯 몸을 푼다. 어떤 가려움과 어떤 미련 같은 것들이 부수수 솟아나 풍미가 사라진 알코올을 따라 흐른다. 흐린 기억들이 하나둘 살아났다 사라진다.

바둑, 책 읽기, 영화, 드라마, 음악 감상, 걷기, 카메라 만지기, 블로그 운영, 식물, 열대어 키우기, 만년필, 위스키 즐기기, 반신욕, 그리고 공상과 망상 정도로 취미가 이어지고 있다. 수박 겉핥기식이나마 계속하는 것도 있고 멈춘 것도 있다. 약간 수집벽과 정리벽이 있어 진짜 취미가 집이나 공간 가꾸기가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새처럼 작은 가슴에 새처럼 작은 마을이 산다. 너그럽지 않은 날들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