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에 해당되는 글 3건

  1. 푸른 산그늘에 2025/04/15
  2. 봄의 세계에서 2025/04/12
  3. 老酉堂記 2025/04/05

푸른 산그늘에

from text 2025/04/15 19:50
잊자 잊어버리자 별 거 있나 그렇게 세월만 보내다 그저 사람이 좋아 뭐 다 살자고 하긴 그러다 보면 그저 잊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또 한 시절이 아니 너는 누구니 생각 없는 얼굴이 그저 한 세상이 가고 다시 오지 않을 거긴 어디니 오래 잊으려다 잊으려던 널 까맣게 그 시절이 어디 가고 언제 가버린 건지 기억이 그저 적막이 아니 별 볼 일 없는 꿈이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없는 세월이 어디서 뚝 잊지 마오 푸른 산그늘에 걸린 처량할손 작은 거미

* 일부러 따온 건 아니지만, 적막과 처량은 마침 읽은 홍자성의 채근담 1장에 같은 단어가 있었다는 걸 사흗날 아침에 덧붙여 둔다. 제대로 붙잡고 읽다가 뒤에 알았다. 책은 도광순 역주로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건데 다른 역자나 출판사의 것은 볼 것도 없이 이게 제일이다. 다음은 그 1장. 바로 전 근사록의 역자도 도광순이었다.

도덕을 지키면서 사는 이는 일시적으로만 적막하지만, 권세에 의지하고 아첨하며 사는 이는 영원히 처량하다. 달인은 사물 밖에 있는 사물을 보며 자신의 배후에 있는 자기를 생각한다. 차라리 일시적인 적막함을 감수할지라도 영원한 처량함은 당하지 않도록 하라.

봄의 세계에서

from text 2025/04/12 10:18
시간이 한정 없을 것 같던 날들은 다 지났다. 좋던 날들을 어찌 그리 허비하였을까.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 아까운 것이라더만, 이제 뭘 해도 아깝지 않은 나이가 된 걸까. 희거나 붉고 연두와 초록이 뒤섞인 봄의 세계를 보고 있자니 문득 공부 욕심이 난다. 고전을 좀 봐야겠다. 은퇴를 임박하여 그런가. 시, 소설이 좋더니 어째 그랬나 싶고, 수필이 좋고 옛것이 좋다. 매화를 생각하다 김용준의 새 근원수필을 다시 읽었고 이태준의 무서록도 새로 읽었다. 법구경 이야기는 이제 2권으로 접어들었는데 잠시 두고 노자, 장자도 다시 꺼내 볼까 한다. 그러고는 서가에 읽지 않은 채 꽂아 둔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아야겠다. 사서 읽지 않은 책이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스럽다. 하긴 읽은 책도 얼마든지 다시 읽어도 좋겠다. 죄다 처음 읽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다음은 주희의 근사록 첫 대목. 채근담이 있었나,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잠시 빼들었는데 어린 날 공부하던 흔적이 낯설기만 하였다. 그나저나 옛사람의 세계가 참으로 경이롭지 않은가.

염계 선생이 말하기를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여 양을 생한다. 동이 지극하게 되면 정이 되고 정은 음을 생한다. 정이 지극하게 되면 다시 동하게 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게 됨이 서로 뿌리가 되어, 음으로 나누어지고 양으로 나누어져서 양의(兩儀)가 이뤄진다. 양이 변화하고 음이 합쳐져서 수·화·목·금·토를 생한다. 오기(五氣)가 고루 퍼져서 사시(四時)가 운행된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곧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함에 있어서는 제각기 하나의 성(性)을 갖는다. 무극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하게 합쳐져서, 건도(乾道)는 남자가 되고 곤도(坤道)는 여자가 된다. 이 두 가지 기가 서로 교감하여 만물이 생하게 되니, 만물은 생하고 또 생하여서 변화가 끊임없다. 오직 사람은 가장 빼어난 기를 얻어서 가장 신령스러운 것이거니와, 형체는 이미 생겨났고 정신은 피어나서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오성(五性)이 느껴 움직임으로써 선악이 나누어지게 되고 오만가지 행동이 나타나게 된다. 성인(聖人)은 선악과 행동의 도리를 정함에 있어서, 중정(中正)·신의로써 하며, 정(靜)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도를 정립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이 합치하며 사시와 더불어 그 질서가 합치되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이 합치된다. 군자는 이러한 도를 닦게 되니 길하고 소인은 이러한 도를 거스리니 흉하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의 도를 정립하여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리를 정립하여 유와 강이라 하며 인극(人極)을 정립하여 인과 의라 하였다. 또 시원을 찾아서 종말로 되돌아오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죽고 삶의 이치를 알게 된다. 크도다, 그 변화여! 그 이치가 참으로 지극하도다' 하였다.

老酉堂記

from text 2025/04/05 10:24
老酉堂에 노니는 老舟 이야기다. 노주는 술을 즐기고 가만히 있거나 때때로 걷는 걸 좋아하여 기꺼이 노유당에서 노는데 어째 헛발질도 잦고 잘 자빠지기도 한다. 즐거이 즐기기란 언제나 난망한 일이다. 노주는 한때 비가 오지 않는 노유당을 떠나 세상을 유랑하였다. 사람을 만나고 길을 잃고 역사를 이루었다. 땅을 갈고 강을 건너 꽃도 피웠다. 시간이 지나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다 빈 건 아니었다. 노유당에 노주만 있던 건 아니다. 형상이 달랐을 뿐 뜨내기도 붙박이도 있었다. 노주가 노니는 노유당에 봄이면 서러움이 내려앉고 가을이면 일찍 어둠이 내려앉았다. 노주는 노을이 눈처럼 내리는 날이면 오래된 술항아리를 꺼내 노유당 그늘에 앉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거나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 항아리가 비어가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다. 빈 것이 그리워 밤을 새고 수탉처럼 홀로 울기도 하였다. 뜨내기도 붙박이도 같이 우는 것만 같았다. 간이 콩알만 한 노주는 가만히 있거나 때때로 걷기를 좋아하여 악보가 든 老舟文集 세 권을 남겼다. 빈 술항아리를 깨트리던 날 노주는 문집을 불살라 제를 지냈고, 메마른 노유당에 처음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