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에 해당되는 글 375건

  1. 큰물이 일 때에는 2024/11/19
  2. 먼저 간 자들아 2024/10/29
  3. 오래된 풍문 2024/10/19
  4. 새생활신조 2024/09/29
  5. 동면 후에는 2024/09/21
  6. 가을맞이 2024/09/08
  7. 예쁜 게 장땡 2024/08/03
  8. 만년필 세상 2024/07/28
  9. 어떤 세계 2024/07/17
  10. 늙은호박 2024/07/08
  11. 낙화 2024/06/26
  12. 언제나 2024/06/09
  13. 잔을 비우며 2024/05/02
  14. 사월을 보내며 2024/04/30
  15. 어떤 무대 2024/04/10
  16. 걸어라 2024/02/29

큰물이 일 때에는

from text 2024/11/19 18:05
겨울엔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에서 아직 몇년째 휴학 중인 절름발이 친구와 사나흘 술이나 마시면 좋겠네.

연탄불은 가끔 꺼지고, 입김이 서로의 얼굴을 가리는 흐린 방에서 산 넘어 동쪽에서 온 여인과 또 그의 젊은 애인과 실직한 후배와.... 이렇게 꾸벅꾸벅 졸며 양미리를 구우며 막걸리 병을 쓰러뜨리며 어떤 기다림에 온종일 귀를 기울이면 좋겠네.

술만 먹다가 죽은 후배 이야기를 하면서, 불운한 연애 끝에 죽은 여인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에서 헤어진 후 영영 소식 끊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 살아남아 양미리를 굽는 우리의 손등을 바라보리. 취해가는 인생을 바라보리. 아직 파랗고 선량한 가난과 비참을 바라보리.

그러나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이여, 절름발이 친구여, 이제는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겨울만 남았고나. 이름 부르면 곧 달려올 것 같은 우리의 가난과 비참만 남았고나. 고지서 같은 세월이, 독촉장 같은 인생이 쓰러진 막걸리 병처럼 도처에 나뒹군다. 아아,

팔십여 일 되었구나. 술을 멀리하는 동안 이상하리만치 술 생각이 나지 않더니, 류근의 이 작품을 보고 잠시 술 생각이 간절하였더랬다. 그래, 큰물이 일 때에는 물속에서도 수그리는 것이 상책이다. 어디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고 안다 한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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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자들아

from text 2024/10/29 21:10
마음을 따르기는 쉽지만 머리를 따르기는 어렵고, 죽음은 증상이 아니라 결과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글쎄 그럴 수도 있겠다. 어떤 날은 반나절에 반평생이 가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나절이 열두 번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엿새 후에 해가 저물 때 비로소 한 세상이 저물기도 한다. 갈 곳 없는 마음이 집을 찾기도 하고, 뱁새처럼 비비빕비 울기도 한다.

* 오늘로 여기 온 지 딱 오십오년이 되었다. 지나온 날들과 지나갈 날들이 다 아쉽고 쉽지 않을 테지만, 먼저 간 마음 잘 따라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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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풍문

from text 2024/10/19 08:35
세상일이야 본디 시시하고 경이로운 것. 만물은 태생이 하나라 어떤 화두든 오래 붙들고 있으면 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다시 새로운 질서가 온다고 한다. 가만히 숨었다가 천천히 움직이라고, 심장 같은 건 허공에 두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으라고.

술과 커피, 차를 마시지 않고 먹는 걸 줄이면서 뭘 안 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안 하는 걸 하는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먹는 즐거움, 마시고 취하는 즐거움, 뭔가를 하는 즐거움 못지않은 이 하지 않는 즐거움이 좋다. 더할 길 없어 빠지는 거면 어떠랴. 세상일이야 본디 시시하고 경이로운 걸.

새생활신조

from text 2024/09/29 09:52
집착이나 중독에서 벗어나, 술을 멀리하고
카페인도 줄이고 책도 좀 읽고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기.
인정을 아끼고, 몸과 마음을 단정히.

* 얼마나 알아야 준비가 되는 걸까. 얼마나 알아야 괜찮은 걸까.

동면 후에는

from text 2024/09/21 19:54
동면에서 막 깨어난 듯, 몇 군데 필름이 끊어진 것 같은 상태로 구월을 보내고 있다. 정신머리가 술에 익숙하니 그런가, 술을 멀리하는 동안 꼭 잔뜩 취한 것처럼 머리 회전도 잘 안 되고 말이 맥락없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다시 익숙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글쎄다, 못난 놈이 식물의 지혜를 익히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종일 비가 내리고, 이제사 진짜 가을이 올 모양이다. 모처럼 거실에서 듣는 빗소리,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정겹다. 그래, 그만하면 본성을 거슬러 오래 왔다. 나이를 먹으면 묵묵히 받아들이거나 포기할 줄 알게 되지. 이것도 자연의 섭리겠다. 먼길을 가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법이라더만, 참으로 위없을 일이로다.

배우기 싫어도 배우게 되는 게 있고,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게 있더라. 아무려나, 기다린들 더는 서두를 일 없다. 어서 가자, 애써 이를 일 없다. 어리석은 것이 차마 닮지 말 것은 닮지 말자, 꼭꼭 이를 뿐.

가을맞이

from text 2024/09/08 07:02
뭔가 알 것 같고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을 때가 있는데 대체로 이미 늦었다는 감도 같이 들게 마련이다. 근데 이게 막상 늦어도 늦은 게 아닌 거고, 길을 걷다 보면 어제를 걷기도 하고 내일을 걷기도 하는데 이게 또 오늘을 제대로 걷게도 하는 거다. 심연은 무슨 색일까. 파란 하늘, 새파란 바다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같은 눈, 같은 마음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갈 길이 아직 멀다.

* 늘 술과 함께하던 생을 바꿔 보기로 한다. 갈데없는 마음도 쓸데없는 미련도 버리고.

예쁜 게 장땡

from text 2024/08/03 00:54
펜을 갖고 놀며 이것저것 써보다 여러 번 필사하게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하도 이뻐 옮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며칠 사이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 잉크와 미도리 페이퍼 패드, 고쿠요 노트 패드를 추가하였고, 몇 가지 만년필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년필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이웃한 필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모처럼 내가 가진 라이카 카메라와 렌즈들 근황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렌즈야 그렇다치고 카메라 시세가 너무 올라 깜짝 놀랐다. M6 복각판이 나왔다는 소식도 처음 알았다. 만년필은 꾸준히 새 제품이 나오고 있고 필름 카메라도 새로 나오는 마당에 몇 년째 냉동실에 잠자는 필름도 한번 깨워보나 어쩌나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가격의 기계를 들고 엉터리를 찍게 되겠구나. 아날로그와 아마추어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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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세상

from text 2024/07/28 09:18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안다. 카메라 본체보다는 렌즈가, 렌즈보다는 필름이 결과물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찍는 사람이나 현상, 인화 과정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나 렌즈보다 후처리 과정이 결과물에 훨씬 크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후처리 작업이나 필름 등에 신경을 쓰기보다 렌즈나 카메라를 살펴보고 구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짧게나마 만년필의 세계에 들어와 노닐다 보니 생각난 얘기다. 만년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필감과 결과물일 텐데 역시 펜보다 잉크가, 잉크보다 종이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취미 생활이란 게 그것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장비나 도구를 살펴보고 고르고 지르는 재미를 빼놓고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능을 떠나 관상을 목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으니.

여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여행의 즐거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등산 장비를 고르고 등산 코스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과정이 모두 등산 생활인 것처럼, 만년필 세상도 구석구석 살펴보고 노는 재미가 있다. 정착이 어려운 세상이다. 펜도 그렇지만 잉크와 종이에 이르면 어마어마하다.

0124님에게 맛을 보라고 카웨코 클래식 스포츠 EF닙(뽑기 잘못으로 M닙 추가 구매)과 여러 잉크 카트리지들, 사무실에서 쓰려고 파이롯트 라이티브 F닙과 카트리지, 컨버터를 샀고, 파이롯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구매대행으로 커스텀 헤리티지 912 FM닙을 주문하였다. 잉크는 이로시주쿠 월야, 송로, 산밤, 죽림, 그리고 디아민 이클립스를 추가하였고, 우공공방의 원목 트레이와 양지사의 디루소 메모 패드 리필용 여러 권을 구입하였다.

사진기를 만지거나 물생활을 할 때도 그랬듯이 큰 세상 앞에서는 기가 죽어 딱 괜찮은 보급기나 중급기 기준에서 만족하고 나름 즐길 걸 안다. 타고난 소심함과 옹졸함이 어디 가겠나. 더 대형이나 고급으로는 가지 않는 저항선이 있다. 지를 건 어서 지르고 천천히 즐기면서 새 세상을 누리리라.

다음은 필사하다 다시 만난 고형렬의 시 '중' 전문.

어떤 시인도 나에게 콤플렉스는 아니다
나의 콤플렉스는 오직 이들뿐이다
소 똥과 오줌으로 약을 삼으며
남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로 옷 해입고
똥막대기에 해골을 꿰 어깨에 메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자가 못되더라도
나무 안경을 쓰고 어느 산골에
오직 경 하나와 옷 한벌로 세상을 보고
가만히 살아가는 겨울산과 같은
중, 그 중이 왜 이렇게 부럽게 되었는가
오, 중이여 막대기 하나와 옷 한벌과
신발 한짝 모자 하나로 떠돌거나
한 방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중이여
육식을 하지 않으며 산속에 살고
바람 속에 잠이 드는 저 불굴의 중이여
내 생은 내 육신 속에서 죽어가
이젠 영영 다다를 수 없는 길이 되었는가
어떤 사랑도 꽃도 나의 적은 아니었다

* 타이핑 된 걸 필사하는 건 좋은데, 이 포스팅처럼 적은 걸 자판으로 두드리자니 예전처럼 즐겁지 않구나. 아날로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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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

from text 2024/07/17 19:28
지난 삶을 생각하니 기억의 총량을 벗어날 수 없구나. 남은 기억이 지난 삶의 전부로다. 언젠가부터 더해지는 기억은 없고 잊혀지거나 지워지는 기억만 있다. 용서해 다오. 모자란 놈이 모질진 않았으나 미덥지도 않았겠다. 며칠 전에 보니 배롱나무 꽃이 피었더라. 죽으면 새로운 세계로 드니 설렌다는 사람도 있다더만. 모를 일이다.

근래 만년필로 글씨 쓰는 재미에 빠져 있다. 내가 가졌거나 가진 가장 격렬한 취미라면 걷기나 등산이겠고, 매양 잔잔한 재미에만 빠졌거나 빠져 있는데 고요한 것 하나 더하게 되었다. 우선 구입한 건 펠리칸 M215 F닙과 4001 블루 블랙 잉크, 클레르퐁텐, 미도리, 로디아 노트와 밀크 프리미엄 복사용지, 그리고 펜코 클립보드. 반야심경과 몇 편의 시, 도덕경과 장자의 어떤 구절들, 그리고 읽고 있는 책과 블로그에 인용하거나 끄적인 글들의 일부를 필사하였고, 글을 쓰는 이상의 매력에 빠졌다. 사각거리며 미끄러지고 맺혔다 마르는, 펜과 잉크와 종이의 변주, 그 세계에.

올 장마는 유독 길고 자주 많은 비를 뿌리는구나. 살아갈 뿐 기억하지 못하는 중생에게 기어이 기억의 습한 길을 안내하는 듯이.

늙은호박

from text 2024/07/08 21:02
지난해 구월 금호에서 얻은 한아름짜리 늙은호박, 있는 듯 없는 듯 주방 한 구석에서 오래 묵었다. 아무래도 상했지,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사 잘라본다. 상하긴 개뿔. 주황색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단한 두께 안이 불을 켠 듯 환하다. 노을보다 붉게 빛난다. 전도 부치고 범벅도 만들어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구수한 늙은 맛이 난다. 너처럼, 안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두께를 가져야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활활 타오르는 속을 갖고, 한결같이 잘 여물어야겠다. 속이 더 붉어 더는 부끄럽지 않게.

낙화

from text 2024/06/26 19:46
추억이 서린 음악은 얼마나 위험한가. 나이가 들어도 마르지 않는 심장, 바닥으로 꺼지거나 허공으로 사라질 아득함이여. 한잔의 술은 얼마나 불온한가. 거짓 위안과 환상으로, 가는 이를 배웅하는구나. 저 꽃잎은 얼마나 위태한가. 다음 계절이 와도 다시 돋을 줄 모른다. 부질없는 낭만과 뜻한 바 비겁으로 일관한 생애, 비와 마지막 바람을 불러 치명을 완수한다.

언제나

from text 2024/06/09 13:40
그래, 언제나 때를 기다렸지. 과거로 가거나 미래를 추억하고, 길을 접어 주머니에 넣을 적이나, 문득 누군가를 만나고, 흐리거나 비가 내리고, 헤매다 다시 길을 낼 적에도. 때가 되면 알지. 멱살 잡은 건 언제나 내가 아니라 때라는 걸. 그래, 너도 오래 기다렸구나. 먼저 움직이지 않는 세월처럼, 언제나 그렇게.

길을 걷다 보았다. 거기 있던 너. 지나지 않은 지난날.

잔을 비우며

from text 2024/05/02 23:18
두 병에서 세 병으로 가는 그 어디쯤
두고 온 사랑이 있을까
까무룩 잃어버린 꿈이 있을까
그 어디쯤
어린 날 그 어디쯤 가는 길이 있을까

사월을 보내며

from text 2024/04/30 01:14
사월을 보내며
사월에 보낸 그 사람을 생각한다
청춘의 몇 년을
나와 함께 보낸 사람
사월을 보내며
함께 사월을 보낸 그 사람을 생각한다

어떤 무대

from text 2024/04/10 16:20
막이 오르면, (배경)눈 덮인 산하. (배경 음악)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1곡 안녕히 /Gute Nacht, 바리톤. (잠시 후, 독백)누구나 가야 하는 길, 인생은 슬픈 것이로구나. (억겁의 길을 걷는 나그네, 이어지는 독백)잘 있으라, 모두들. (노래 소리 높아지다 곧 암전)침묵 후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나그네는 사라지고, 눈 덮인 산하에 내리는 눈. (배경 음악)20곡 이정표 /Der Wegweiser에 이어 24곡 거리의 악사 /Der Leiermann. (독백)인생은 슬픈 것이로구나, 누구나 가야 하는 길. (천천히 막이 내리며, 이어지는 독백)그대, 잘 가오.

걸어라

from text 2024/02/29 05:16
울적하거든 걸어라
삶이 속이는 것 같거나
세월이 야속하여도
산길이든 들길이든
꿈길이든
살 만하거든 걸어라
딱 죽고만 싶거나
대개 부질없어도
인연이야 모를 일
저 세상 일일랑 잊고
다시 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