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병유시 치병유시

from text 2008/09/08 23:41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조선 중기의 학자 신흠(申欽)의 채록 민담집 '야언(野言)'에 실려 있다 한다. 처음 매화만 알고 좋아했다 오동을 알고 같이 좋아했더니, 오늘 문득 떠올라 찾아보다 나머지 두 구절을 만났다. 피천득의 수필 '용돈'과 '순례'에 위 두 구절이 나오고, 김구 말년의 휘호에 아래 두 구절이 나온다는 것도. 그러다 만난 또 한 구절.

得病有時 治病有時(득병유시 치병유시) 병을 얻을 때가 있고, 병을 다스릴 때가 있다.

아하, 하고 출처를 뒤지다가 누구는 여기서 得詩有時 解詩有時(득시유시 해시유시)를 끌어내고, 누구는 得道有時 治道有時(득도유시 치도유시)를 끌어내는 걸 보았는데, 글쎄 다 그럴 듯해 보인다. 하긴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지라.

* 오늘 도착한 '지리산 편지'를 후딱 다 읽고 말았다. 좀체 한 권만 붙들고 쭉 읽질 않는데, '빛'도 그렇고, 둘 다 편지(?)라 그런가, 했다. 다음은 박규리의 시 '치자꽃 설화'. 이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는데, 여기서 처음 보았다. 두 행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혼자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중 한 대목.

그리하여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 시간에 겨우 십 리를 가는 길이 얼마나 눈부신 속도의 길이며, 한 시간에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의 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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