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해당되는 글 21건

  1. 큰물이 일 때에는 2024/11/19
  2. 예쁜 게 장땡 2024/08/03
  3. 만년필 세상 2024/07/28
  4. 절명을 기다리듯 2015/07/09
  5. 어느 날 어느 때 2009/08/12
  6. 발자국 2009/05/24
  7. 오후 여섯 시 2009/04/28
  8.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2008/12/05
  9. 먼저 가서 4 2008/09/10
  10. 득병유시 치병유시 2008/09/08
  11. 가재미 2008/09/05
  12. 다만 그땐 2008/06/25
  13.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2008/04/10
  14. 가을 일기 3 2006/08/24
  15. 행복할 사람들은 행복하도록 2006/08/20
  16. 개구리 이야기 2006/06/25

큰물이 일 때에는

from text 2024/11/19 18:05
겨울엔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에서 아직 몇년째 휴학 중인 절름발이 친구와 사나흘 술이나 마시면 좋겠네.

연탄불은 가끔 꺼지고, 입김이 서로의 얼굴을 가리는 흐린 방에서 산 넘어 동쪽에서 온 여인과 또 그의 젊은 애인과 실직한 후배와.... 이렇게 꾸벅꾸벅 졸며 양미리를 구우며 막걸리 병을 쓰러뜨리며 어떤 기다림에 온종일 귀를 기울이면 좋겠네.

술만 먹다가 죽은 후배 이야기를 하면서, 불운한 연애 끝에 죽은 여인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에서 헤어진 후 영영 소식 끊긴 친구들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 살아남아 양미리를 굽는 우리의 손등을 바라보리. 취해가는 인생을 바라보리. 아직 파랗고 선량한 가난과 비참을 바라보리.

그러나 춘천시 후평동 끄트머리 자취방이여, 절름발이 친구여, 이제는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겨울만 남았고나. 이름 부르면 곧 달려올 것 같은 우리의 가난과 비참만 남았고나. 고지서 같은 세월이, 독촉장 같은 인생이 쓰러진 막걸리 병처럼 도처에 나뒹군다. 아아,

팔십여 일 되었구나. 술을 멀리하는 동안 이상하리만치 술 생각이 나지 않더니, 류근의 이 작품을 보고 잠시 술 생각이 간절하였더랬다. 그래, 큰물이 일 때에는 물속에서도 수그리는 것이 상책이다. 어디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고 안다 한들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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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게 장땡

from text 2024/08/03 00:54
펜을 갖고 놀며 이것저것 써보다 여러 번 필사하게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하도 이뻐 옮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며칠 사이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 잉크와 미도리 페이퍼 패드, 고쿠요 노트 패드를 추가하였고, 몇 가지 만년필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년필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이웃한 필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모처럼 내가 가진 라이카 카메라와 렌즈들 근황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렌즈야 그렇다치고 카메라 시세가 너무 올라 깜짝 놀랐다. M6 복각판이 나왔다는 소식도 처음 알았다. 만년필은 꾸준히 새 제품이 나오고 있고 필름 카메라도 새로 나오는 마당에 몇 년째 냉동실에 잠자는 필름도 한번 깨워보나 어쩌나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가격의 기계를 들고 엉터리를 찍게 되겠구나. 아날로그와 아마추어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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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세상

from text 2024/07/28 09:18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안다. 카메라 본체보다는 렌즈가, 렌즈보다는 필름이 결과물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찍는 사람이나 현상, 인화 과정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나 렌즈보다 후처리 과정이 결과물에 훨씬 크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후처리 작업이나 필름 등에 신경을 쓰기보다 렌즈나 카메라를 살펴보고 구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짧게나마 만년필의 세계에 들어와 노닐다 보니 생각난 얘기다. 만년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필감과 결과물일 텐데 역시 펜보다 잉크가, 잉크보다 종이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취미 생활이란 게 그것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장비나 도구를 살펴보고 고르고 지르는 재미를 빼놓고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능을 떠나 관상을 목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으니.

여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여행의 즐거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등산 장비를 고르고 등산 코스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과정이 모두 등산 생활인 것처럼, 만년필 세상도 구석구석 살펴보고 노는 재미가 있다. 정착이 어려운 세상이다. 펜도 그렇지만 잉크와 종이에 이르면 어마어마하다.

0124님에게 맛을 보라고 카웨코 클래식 스포츠 EF닙(뽑기 잘못으로 M닙 추가 구매)과 여러 잉크 카트리지들, 사무실에서 쓰려고 파이롯트 라이티브 F닙과 카트리지, 컨버터를 샀고, 파이롯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구매대행으로 커스텀 헤리티지 912 FM닙을 주문하였다. 잉크는 이로시주쿠 월야, 송로, 산밤, 죽림, 그리고 디아민 이클립스를 추가하였고, 우공공방의 원목 트레이와 양지사의 디루소 메모 패드 리필용 여러 권을 구입하였다.

사진기를 만지거나 물생활을 할 때도 그랬듯이 큰 세상 앞에서는 기가 죽어 딱 괜찮은 보급기나 중급기 기준에서 만족하고 나름 즐길 걸 안다. 타고난 소심함과 옹졸함이 어디 가겠나. 더 대형이나 고급으로는 가지 않는 저항선이 있다. 지를 건 어서 지르고 천천히 즐기면서 새 세상을 누리리라.

다음은 필사하다 다시 만난 고형렬의 시 '중' 전문.

어떤 시인도 나에게 콤플렉스는 아니다
나의 콤플렉스는 오직 이들뿐이다
소 똥과 오줌으로 약을 삼으며
남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로 옷 해입고
똥막대기에 해골을 꿰 어깨에 메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자가 못되더라도
나무 안경을 쓰고 어느 산골에
오직 경 하나와 옷 한벌로 세상을 보고
가만히 살아가는 겨울산과 같은
중, 그 중이 왜 이렇게 부럽게 되었는가
오, 중이여 막대기 하나와 옷 한벌과
신발 한짝 모자 하나로 떠돌거나
한 방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중이여
육식을 하지 않으며 산속에 살고
바람 속에 잠이 드는 저 불굴의 중이여
내 생은 내 육신 속에서 죽어가
이젠 영영 다다를 수 없는 길이 되었는가
어떤 사랑도 꽃도 나의 적은 아니었다

* 타이핑 된 걸 필사하는 건 좋은데, 이 포스팅처럼 적은 걸 자판으로 두드리자니 예전처럼 즐겁지 않구나. 아날로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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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명을 기다리듯

from text 2015/07/09 16:21
몸에서 살 썩는 냄새가 난다. 알코올을 그리 들이부었건만. 그래, 이대로가 좋은 거다. 아쉬움도 그대로 두고, 그리움도 접어 두고.

다음은 최하림의 나는 뭐라 말해야 할까요? 전문.

우리는 많은 길을 걸었습니다 아침이면 등산화 끈을 질끈 조여매고, 여름 햇살을 등지고 월령산을 넘어 꽃무덤에 이른 때도 있었고, 덕유산 아래 갈마동에서 눈이 내리는 저녁을 보는 때도 있었습니다 12월이 지나고 1월이 오면 중북부 지방에는 복수초들이 눈 속에 솟아오른다지만, 우리는 겨울 내내 방 안에 박혀 티브이만 보았습니다 다시 봄이 다가와 돌담 아래 민들레꽃이 피어날 때에야 간신히 골목을 빠져나와 실크 머플러와도 같은 햇빛을 목에 두르고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강둑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물이거나 바람이거나 햇빛처럼 반짝였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수많은 모세 혈관들이 입을 열고 햇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버들강생이들도 입을 열었습니다 순간 폭포수와도 같은 소용돌이가 일었습니다 어떤 것도 정지하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 변화를 뭐라 말해야 할까요? 내가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나는 뒤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내가 뒤돌아보며 감정의 굽이를 돌아갈 때, 그대 모습은 사라지고, 나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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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느 때

from text 2009/08/12 23:47
가을 하늘이 푸르고 아름답다는
그저 그것만으로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때는 없는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는 분수도
쓸쓸하게 가지를 떠나는 낙엽 한 잎마저
어쩐지 기쁨에 겨워 춤추는 양 보이는
그런 때가

유정 편역의 일본현대 대표시선에서 쿠로다 사부로오의 시 '어느날 어느때' 전문. 전세 계약 기한은 다가오지만 어째 나갈 일은 멀기만 하여 이사 이후로 미뤄두었던 집안 정리와 재편을 감행하였다. 거실에 있던 TV와 홈시어터 시스템을 없애고(TV는 중고재활용센터에, 홈시어터 시스템은 동생에게 넘겼다) 어렸을 때부터 쓰던 책장에 새로 산 원목 책장 둘을 더해 거실 한쪽 벽면을 서가로 꾸몄으며 컴퓨터를 거실로 내오고 좌탁과 장식장 위에 놓을 책꽂이도 새로 구입하였다. 어지럽던 물건들과 작은방 둘도 말끔히 정리하였더니 새로 이사한 기분인 것이 진을 빼버려 이제 고대하던 이사 일정이 잡힌대도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다.

마루야마 겐지에 빠진 와중에 머리를 식히며 읽은 책 중 추천하는 한 권. 강명관의 '是非를 던지다'. 글 솜씨도 좋지만 따뜻한 심성과 시각이 좋아 더 정겹게 읽혔다. 읽는 내내 정민의 글과 비교가 되었다. 본문 중 이익의 붕당론에서 한 대목.

이제 열 사람이 꼭 같이 굶고 있다가 밥 한 그릇을 먹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릇을 다 비우기 전에 싸움이 벌어진다. 물어보니, 말이 불손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불손한 말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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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from text 2009/05/24 01:50
한 사나이가 갔다. 한 시대가 가듯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해 따라 날 저물 듯 스스로 걸어갔다. 공화국의 등짝에 선연한 발자국을 남기고 그렇게 갔다. 신동엽의 '散文詩 1'로 온종일 먹먹하던 가슴을 달래 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 '담배 있나', 그게 사실이었든 아니든 그렇게 걸어간 마지막 길을 그보다 더 잘 상징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담배 한 대, 끝내 보류해 둔다마는 향 사르듯 사를 날을 또한 기약한다.

오후 여섯 시

from text 2009/04/28 21:55
바람이 불고 철 지난 벚나무 검붉은 입술이 울고 꿈결처럼 대낮부터 미등 불빛들이 꼬리를 물고 신천으로 흐르더니, 오후 여섯 시, 따닥따닥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창가에 선 나는 문득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넘어가는 찰나, 시커먼 하늘 아래 콘크리트 건물들이 비로소 제 색깔을 드러낸다. 삽시간에 인적이 사라지고 고깔을 닮은 우산 하나 하늘을 날아오르는데 문득 새로운 것 하나 이렇게 세상에 떨어진다. 칼국수와 묵밥을 사이에 두고 오랜 시간이 흐른다. 그리운 것들 잠시 접어두고 고요한 휴식을 시작한다. 다음은 김사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서 노숙 전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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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우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이병률의 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전문. 이제야 읽은 '바람의 사생활'에서. 아직도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이 아름다운 생은 끝이 날까. 누가 얼른 와서 슬쩍 일러 다오. 가기 전, 술 한잔 부어줄 터이니.

* 아침, 마치 응답하듯 세찬 첫눈이 내린다. 괜스레 들뜨는 이 마음만 갖고도 한 세상 넉넉하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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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서

from text 2008/09/10 14:42
아니 누(gnu) 한마리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가도 맹수의 배 밑에 깔리고 나서는 먼산을 보듯 순박하고 담담한 눈망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 화면이라 해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격렬히 몸부림치는 게 아닌, 그 어떤 한없는 순종이 나는 감동적이었다.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에서. 그 눈망울을 본 것 같지 않은가.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지 않는가. 그 눈망울이 빤히 바라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한참 무연히 그 눈망울을 마주보다 '한번 가보는 것이다'에 가슴 일렁였던 원규형의 시 '먼 길'이 떠올랐다. '득병유시 치병유시'에 달아두려다 새로 올린다.

돌담 위의 굴뚝새야
앞 도랑의 버들치야

강 건너
산 넘어 간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그곳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이다

저승길이 대문 밖이니
인연이 다했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
저 세상에
더 많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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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병유시 치병유시

from text 2008/09/08 23:41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조선 중기의 학자 신흠(申欽)의 채록 민담집 '야언(野言)'에 실려 있다 한다. 처음 매화만 알고 좋아했다 오동을 알고 같이 좋아했더니, 오늘 문득 떠올라 찾아보다 나머지 두 구절을 만났다. 피천득의 수필 '용돈'과 '순례'에 위 두 구절이 나오고, 김구 말년의 휘호에 아래 두 구절이 나온다는 것도. 그러다 만난 또 한 구절.

得病有時 治病有時(득병유시 치병유시) 병을 얻을 때가 있고, 병을 다스릴 때가 있다.

아하, 하고 출처를 뒤지다가 누구는 여기서 得詩有時 解詩有時(득시유시 해시유시)를 끌어내고, 누구는 得道有時 治道有時(득도유시 치도유시)를 끌어내는 걸 보았는데, 글쎄 다 그럴 듯해 보인다. 하긴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지라.

* 오늘 도착한 '지리산 편지'를 후딱 다 읽고 말았다. 좀체 한 권만 붙들고 쭉 읽질 않는데, '빛'도 그렇고, 둘 다 편지(?)라 그런가, 했다. 다음은 박규리의 시 '치자꽃 설화'. 이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는데, 여기서 처음 보았다. 두 행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혼자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중 한 대목.

그리하여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 시간에 겨우 십 리를 가는 길이 얼마나 눈부신 속도의 길이며, 한 시간에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의 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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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from text 2008/09/05 12:44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의 시 '가재미' 전문. 시간을 두고 몇 번을 읽어도 '파랑 같은'에서는 울컥, 하고 만다. 별일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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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땐

from text 2008/06/25 14:49
조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겠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겠다. 말하자면 역사가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다 하여 접시 물에 코를 빠뜨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것이다. 내가 아는 것보다 충분히 악의적인 것이다. 해서 말인데, 술과 안주 앞에 맹세를 놓듯이, 두 손 두 발 놓고, 우리가 세상을 외면하잔 거다. 물론 사태의 결말을 책임질 순 없다. 다만 그땐 손짓이 보일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세상이든 누구든, 저도 돌아앉게 마련이니.

* 별처럼 찾아온 거다. 고운 꽃처럼 다가온 거다. 부여안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안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거다. 그게 명령이다. 그때 명령의 정체다. 손짓마저 외면할 수는 없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 조금 전, 노태맹의 '푸른 염소를 부르다', 권여선의 '분홍 리본의 시절',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슬라보예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이 왔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를 보고 마음 동해 주문한 책들. 거기 여러 잠언들이 있었지만, 하나만. 고통은 무례를 용서하게 만드는 법이다.

다음은 태맹이형의 시집 뒤에 실린 인상적인 '시인의 산문' 중 한 구절.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오래, 가장 강렬하게 사랑한 이 것. 조사 하나를 들고 밤새 문장 한 구석에 꿰어 맞추기하던 날들. 입 안에 얼음이 씹힌다. 고맙다, 덕분에 많이 고통스러웠다. 젠장.

그리고 시 한 편.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5월이 다 지나도록
아파트 화단 동백꽃이 지지 않는다.
져야 할 것이 지지 않으니
끔찍하고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건 확실히 강박장애다.

난 중력에 병들어 있는 거다.
동네 돼지 수육집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이제 아무에게도 나를 이해시키지도
누구에게도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革命이
붉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든
동백꽃처럼 그 자리에서 지지 않든
그건 동백이 가고 그 동백을 만나러 오는
봄바람의 몫이다. 모가지를 꺾고
붉게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봄바람의 동백꽃들 몫이다.

막걸리잔에 앞머리 적시며 졸다가
나 문득 한 소식 본다. 사랑이란
그 사랑을 타인으로 놓아주는 것
지지 않는 동백꽃을
그저 붉은 동백꽃으로 바라다보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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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from text 2008/04/10 19:26
최근 만난 글. 신경림의 시 '낙타' 전문과 서준식의 옥중서한 중 1985년 10월 26일자 편지 중에서. 무슨 덧붙일 말이 있겠는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는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모두'가 아니면 '없음'을, 빛나는 영광이 아니면 파멸을 원했던 나의 오만한 마음은, 이리하여 지금 '없음'과 파멸의 심연을 바로 눈앞에 보며 쓰러져 있다.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악과 부정과 비열에 대한 증오에 대한 증오까지도 나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고 나의 목소리를 쉬게 했다. 나의 마음을 비틀어 놓았다.

* 이번에도 내가 표를 준 사람은 당선 문턱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아니 아예 의미 있는 수치를 기록하지 못하였다. 면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지역구는 애초 진지하게 기권을 생각하였으나, 나머지 한 표를 조용히 행사하려고 빗길에 아이를 데리고 나선 김에 보탠 것인데, 막상 전체 결과를 대하고 보니, 잘 갈라섰다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갈라서지 않았더라면 하는 데로 향하며 더욱 참담하였다(2.94%라니, 그럴 상태가 아니긴 했지만, 주위에라도 좀 적극적으로 알렸어야 했을 것 아닌가 후회스러웠다. 어쩌면 기대보다 높은 수치였는지 모르지만, 그쪽보다 서울 지역 득표율이 높았다는 걸 애써 위안 삼을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뜻밖의 성과들도 있었지만, 아깝고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았다. 누굴 탓하겠는가.

가을 일기

from text 2006/08/24 06:55
나는 어젯밤 예수의 아내와 함께 여관잠을 잤다
영등포시장 뒷골목 서울여관 숙박계에
내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넣었을 때
창 밖에는 가을비가 뿌렸다 생맥주집 이층 서울 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가 더 붉게 보였다
낙엽과 사람들이 비에 젖으며 노래를 부르고
길 건너 쓰레기를 태우는 모닥불이 꺼져갔다
김밥 있어요 아저씨 오징어나 땅콩 있어요
가을비에 젖은 소년이 다가와 나에게 김밥을 팔았다
김밥을 먹으며 나는 경원극장에서 본 영화
벤허를 이야기했다 비바람이 치면서
예수가 죽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먹다 남은 김밥을 먹었다
친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없는 나는
아무래도 예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아 미안했다
어디선가 호르라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곧 차소리가 끊어지고 길은 길이 되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녀가 벗어논 속치마 위로 기어갔다
가을에도 씨 뿌리는 자가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불을 껐다
빈 방을 찾는 남녀들의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야윈 어깨가 가을 빗소리에 떨었다
예수는 조루증이 있어요 처음엔 고자인 줄 알았죠
뜨거운 내 손을 밀쳐내며 그녀는 속삭였다
피임을 해야 해요 인생은 짧으나 피임을 해야 해요
나는 여관 종업원을 불러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피임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겠다던 종업원은 돌아오지 않고 귀뚜라미만 울었다
가을비에 떨면서 영등포경찰서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때
서울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정호승의 시 '가을 日記' 전문.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다 말다 한다. 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권장로님과 대화 중 '낙샘더위'라는 말, 즉흥적으로 지어낸 말이지만 느낌이 좋다. 떨어지는 걸 샘내는 더위(이런 걸 보면 한자어는 이제 정말 우리말이랑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낙이 그냥 외로 우리말처럼 보이니 말이다). 삼월 개학처럼 학생들 개학하고 한 열흘은 덥다는 장로님 말씀에 대꾸하여.
오래전 김규항의 블로그에서 읽은 말이 요즘 자주 맴돈다. "다 부질없어 형. 아이하고나 많이 놀아 줘."

오래 돼서 희미하지만, 닌자 거북일 보면 할배 거북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와 지금의 네 가치를 혼동하지 마라. 참으로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어젠, 아침부터 낮술 한 잔 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달리기로 작정하였지만, 대작키로 한 놈, 달이삼촌과 시간이 맞지 않아 점심으로 우동과 군만두를 먹는 바람에, 목욕하며 시간 좀 보내고, 결국 네 시부터 마시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먹는 갈치구이가 맛있었다. 술맛이 오를 즈음 이 녀석에게 급한 볼일이 생겨 한 시간 반 가량 볼일을 보고 차수를 이을 수 있었다. 아, 행복할 사람들은 행복하도록!!


달면 뱉고 / 쓰면 삼킨다 / 가죽처럼 늘어나버린 / 내 청춘의 혓바닥이여(이상희의 시 '잘가라 내 청춘' 전문)

인생은 그 날이 꽃과 같아 단 한 번의 몰락으로 나는 / 죽은 뿌리의 욕망을 알게 되었다(함성호의 시 '고향집, 폐허' 중에서)

산을 오르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몸무게에 의해 실존주의자가 되었다가 산꼭대기에 이르면 유물론자가 된다.(황지우의 시 '靈山' 중에서)

대다수가 자신의 고역을 동댕이쳤을 때, 또한 그의 마지막 '가치'도 동댕이쳤다. 무엇에 대하여 자유롭게 되었는가, 하는 것 따위는 짜라투스트라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분명히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F.W.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저 세상에 가서도 그림을 사랑하자 / 그림이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인사동 어느 화방에서)

살고 싶으면은 죽은 체 하라, 죽은 체 하면 행복이 온다.(어느 TV 만화 영화에서, 꼬마들이 부르던 노래)

讀書之有患之始(김성동 '風笛' 중에서)

예술가는 좀 게을러야 해. 그래야 이것저것 궁리할 시간이 많지.(백남준)

공격성이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으며, 사랑이 없는 미움이란 있을 수 없다.(콘라트 로렌츠 '공격성에 관하여' 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중에서)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김중식의 시 '이탈한 자가 문득' 전문)

다른 주머니 속에서 담배갑이 손에 닿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한바탕 일을 끝마치고 한 대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마지막 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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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이야기

from text 2006/06/25 00:17
개구리가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폴짝 폴짝' 잘 뛰었습니다.
어떠한 위험이 닥쳐도 '폴짝' 피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 불행인지 다행인지 개구리는 커다란 뱀에게 먹히고 말았습니다.
개구리는 몸을 삭여가며 긴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팔이 하나쯤 없어질 때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문득 빛을 찾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다 없어져도 좋았습니다.

개구리는 희망을 갖고 이리 저리 살펴 보았습니다.
아, 저만치 앞에서 빛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개구리는 힘껏 뛰어뛰어 그 곳에 갔습니다 - 벌써 몸의 반은 삭아 없어졌습니다.
그것은, 빛이 나는 그것은 동료의 뼈였습니다.
개구리는 모든 희망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구리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료는 여기까지 와서 죽었다.'
'나는 반이나 산채로 여기까지 왔다.'
'몸이 다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지 않았던가.'
그리고 개구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개구리는 힘을 내어 다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수많은 동료 개구리들을 보았습니다.
앉은 채로 몸을 삭이는 개구리…….
결국은 나갈 수 없다고 외치는 개구리…….
힘을 낭비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살자는 개구리…….
우리의 개구리는 어느 개구리의 말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위는 온통 암흑이고, 동료 개구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개구리는 전혀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빛.
나아갈수록 개구리는 자신과 빛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멀리까지 와서야 개구리는 자신의 몸이 다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빛조차도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아니 언제까지나 빛은 자신과 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등학교 이학년 겨울, 교지에 시라고 준 것이 쉬어가는 페이지에 실렸다. 독서토론회(하야로비)를 맡고 있어 청탁으로 쓴 글인데, 어린 시절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인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쓴 글 두 편 중 하나. 하나는 어딜 가고 없다.

제목은 개구리 이야기. 후에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세 학교 연합독서토론회(날개)를 만들었는데, 다른 학교 후배들로부터 개구리 선배로 불리는 계기가 되기도. ~읍니다를 ~습니다로 수정.

지금도 데미안이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 따위에 실리는 걸 자주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작자들이 읽기나 하고 이런 짓거린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독서란 게 원체 읽는 놈(의 처지나 환경, 기반, 상태 등등) 마다 다르고, 같은 놈이 읽어도 읽을 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그리고 괜찮은 책 치고 위험하지 않은 책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대상에 따라 정도는 가려야 할 게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때 한 말 중 기억에 남는 말 하나. 神이 인간에 준 가장 큰 축복은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