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2

어제, 그제 진주로 해서 남해에 다녀왔다. 15년쯤 전 남해 여행의 마지막 날 코스를 고스란히 거꾸로 되짚는 것처럼. 다만 그때는 창선삼천포대교와 어지러운 펜션들이 없었고 관광산업에 목숨을 걸었거나 돈에 미친 사람들이 적었다. 어쨌든 모처럼 일상을 벗어난 홀가분함에다 줄곧 따라다닌 비까지,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탄 일행들과 무관하게 새록새록 살아나는 추억에 잠길 수 있어 좋았다. 촉석루, 남강장어, 창선삼천포대교, 남해스포츠파크호텔, 부성횟집, 남해별곡식당, 남해대교, 그리고 도둑게와 갯강구떼.

없는 동안 세 모자가 찍은 사진들이 예쁘다. 아비는 세 살 터울 남자 형제로 자라며 서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곱게 정 나누고 연대하기를 바란다.

카테고리 D50

141일째

141일째. 한창 뒤집고 가끔 배밀이를 시도하며 곧잘 사람을 응시하곤 한다. 백만 불짜리 미소와 가늠할 길 없는 포커페이스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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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D50

기나긴 이별

사용자 삽입 이미지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부터 처음 주도를 단련하는 놈처럼 마셔대던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풍만한 유머와 거침없는 품격, 끊임없이 출현하는 술과 담배, 독립적인 인격들과 그만한 쓸쓸함이 넘치는 매혹적인 세계였다. 작가의 이름이 생판 낯설진 않다 했더니 책꽂이 한쪽 구석에 초기작 거대한 잠(The Big Sleep)이 있었다. 책 뒷날개의 메모를 보고 기억을 더듬으니 93년 12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와 함께 그 옛날 술친구에게 받은 책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이들이 바로 서점에서 그냥 들고 나온 책들인지도 모르겠다. 들어본 적 없는 출판사의 문고판에다 간략한 역자 소개조차 없어 번역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감흥 없이 읽고 그대로 그 소감을 전한 기억이 난다. 젠장, 이놈의 정신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뒤처지고 하잘것없기는 매한가진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유머를 보라.

그는 풀러사(옮긴이에 따르면 유명한 옷솔 회사란다) 직원이 관심을 보일만한 눈썹을 치켜떴다. / 빅터의 바는 너무나 조용해서 문 안에 들어설 때 기온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 분홍빛 머리의 참새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단지 참새만이 쪼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쪼고 있었다. / 염소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는 나를 살짝 쳐다보더니 그보다도 더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그 말고는 미동도 없었다. 더 나은 일을 위해서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모양이었다. / 그는 짧은 빨강 머리에 무너진 허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부인이 희미하고 덧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거의 침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문장들도 즐비하다. 53년 작품이다.

스스로 만든 함정만큼 치명적인 함정은 없다. / 세상의 모든 조용한 바에는 그렇게 슬픈 남자가 한 명씩은 있다. / 그때까지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알았을 겁니다. 대부분이라고 해야겠죠. 여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벌 한 마리가 나무 창문턱을 기어 다니며 피곤한 듯 가냘픈 소리로 윙윙거렸다. 이제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없으며, 자기는 끝장났고, 너무나 많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다시는 벌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 여자가 단지 어린 소녀였던 때도 한 번은 있죠. / 술꾼들은 교육이 안 돼, 친구. 그 사람들은 무너져버렸거든. / 기계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인간은 전화를 사랑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갔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 나를 사랑하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경쟁자가 없다는 거지. / 그렇지만 그때부터는 뭔가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는 강철 같은 정신의 1센티미터가. / 범죄는 질병이 아니에요. 단지 증상이지. /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내가 여자기 때문이고 여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들이

조용필이 부르는 떠나가는 배, 지금도 마로니에는, 달맞이꽃을 소리 높여 듣다 보면 소리 높여 따라 울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며칠, 난데없는 소나기가 반가워 한 시절 그렇게 또 견디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1년에 한 장만 건질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런 주장에 대해 많은 후대의 사진가들은 브레송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다. 1년에 한 장은 어림도 없다.”

곽윤섭의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중에서. 그럴 리야, 그렇게 엄밀하고 까다로웠다면 그 이름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이 도시의 동쪽 끄트머리에 이만한 번화가가 있다니 낯설고 여전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제와 오래 사귄 남자 친구(최근 안정된 일자리를 구했다. 소식을 듣고 축하한다고 보낸 문자에 처제는 무엇보다 남자 친구가 이제 당당해질 수 있어 좋다고 답했다. 별스레 가슴 한 편이 아렸다)가 찾아와 모처럼 사진기를 들고 나선 일요일 나들이.

바둑대회 2

사용자 삽입 이미지월요일 아침은 유독 더 분주하다. 아침 미팅으로 일주일에 하루 0124님이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하기 때문이다. 출산휴가 끝나고 두 번째 월요일, 요즘 율이를 봐주시는 어머니께서 일찍 데리러 오셔서 0124님과 나가고 나서였다.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 서둘러 준비를 마친 녀석을 두고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잠깐 놀랐다. 아침에는 한동안 그런 일이 없었는데 혼자 바둑 한 판을 다 두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옷을 입고 어제 생각으로 애잔한 마음에 살짝 뒤에서 보자니 계가에는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 곳곳에 흩어지고 열 집 단위로 잘 구획되지 않는 집들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도와달란 말에 같이 계산을 해보니 백이 반상으로 두 집을 이긴 바둑이었다. 순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되고 말았는데, 어제 본선에서 녀석이 흑으로 딱 두 집을(덤까지 여덟 집 반을) 졌던 때문이다. 내용이야 달랐지만 우연치고는 참, 애잔한 마음에 더해 무언가 울컥하는 게 있어 출근길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이 갔다.

* 오후에 잠시 어제 대회를 검색하다가 낯익은 이름을 보았다. 유치부 우승과 준우승자의 이름이었는데 준우승자는 어제 예선에서, 우승자는 본선에서 서연이와 맞붙은 아이들이었다. 검색 결과를 통해 좀더 알고 보니 이 녀석들은 지난 10일 열린 제15회 구미시장배 대회에서 준우승자는 우승을, 우승자는 공동 3위를 차지한 나름 실력파들이기도 했다.

* 월요일은 0124님 야근하는 날인데다 나도 일이 늦어 온 식구가 늦게 들어왔더니 다음날 아침까지 바둑판이 그대로 있었다. 다시 계가하고 자세히 들여다봐도 어째 신통방통하여 사진 한 장 올려둔다.

바둑대회

역시 강호엔 고수가 많았다. 영남이공대학 천마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대구시장배 전국 바둑대회 유치부 경기. 조별 리그로 치러진 예선은 겨우 통과하였으나 본선 16강 토너먼트에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팔 개월 배운 실력에 처음 나가본 대회, 대진운까지 크게 기대할 여건은 아니었으나 저도 나도 내심 벼르던 경기였는데 많이 아쉬웠다. 내내 같이 흥분 상태였으나 녀석은 나보다는 한 수 위였다. 시작 전 개회식 때에도 잔뜩 긴장하는 건 나였고, 대국 때에도 녀석은 설렁설렁 두는데 보는 나는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다. 끝나고 나서도 속이야 어떻든 담담한 녀석과 달리 집에 돌아와서까지 괜스레 분하고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은 나였다. 한껏 부풀어 있다 실망하여 힘들어하면 어쩌나 했던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녀석은 잠들기 전 잠깐, 오늘이 금요일이었으면 그래서 내일도 쉬고 대회도 하기 전이었으면 하고 속내를 설핏 비추고는 마는 것이었다. 그 작은 가슴에 헤아릴 길 없는 무언가가 자리 잡(히)고 있는 모양이다. 녀석, 자꾸 나대기만 하는 것 같아 걱정이더니 좀더 그냥 내버려두어도 좋겠다 싶다.

서율 2

외탁을 많이 한 듯, 생김새도 그렇고 제 형에 비해 덩치가 좋고 선이 굵은 녀석. 나를 닮은 구석이 적어 섭섭키도 하더니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 차츰 정이 간다. 어릴 때 그렇게 점잖고 진중하더니 재바르게만 변해가는 제 형을 보아서 조심스럽긴 하나 어딘지 듬직한 구석까지 있어 더 반갑고 고맙다. 잘 자라다오.

카테고리 D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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