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5

from text 2008/01/07 20:06
물빛에 비친 행성은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가 다른 세상을 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다. 작은 행성은 돌기를 멈추었고 세상은 잠시 정지하고야 말았다. 이윽고 누군가 낮게 토하던 한숨을 남자는 들었을까. 지키던 별들은 제집으로 갈 시간을 지켰으며, 물빛 속에 노랗게 빛나던 달은 다시 하얗게 바랬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돌에 새긴 믿음이나 약속도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법, 애초에 바람에 새겼던들, 가볍게 새겼던들. 남자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여자는 눈물 대신 붉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기 위해 한사코 웅크리던 때가 있었지. 세상을 흘끔거리던 그때, 산처럼 나를 누르던 것은 나였어. 해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 남은 황금처럼 빛났지만, 눈이 멀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작은 행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있으며 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나 있을까. 마음에 기대 몸서리치는 마음이 갈 자리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남자는 마른 손을 들어 허공에 놓았다. 딱 죽을 것만 같던 마음도 작은 흔적으로 갈무리된다지요, 산다는 일은 그 흔적을 후벼 파고서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것은 낯익은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제야 오랜 되새김을 마칠 때가 온 것일 뿐, 오랜 되새김이 비로소 시작된 것일 뿐. 죽은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이 행성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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