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여자'에 해당되는 글 6건

  1. 낙하 2015/01/31
  2. 남자와 여자 5 2008/01/07
  3. 남자와 여자 4 2 2007/12/20
  4. 남자와 여자 3 2007/12/15
  5. 남자와 여자 2 2007/12/13
  6. 남자와 여자 2007/12/12

낙하

from text 2015/01/31 22:09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서로를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로줄로만 투명한 집을 짓던 수거미가 잠시 쉬는 사이, 어딘가에 단단히 붙어 있던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가을날 잎사귀처럼 돌돌돌 굴렀다. 더는 누가 필요하지 않아도 돌아갈 집은 있어야지. 오롯이 제힘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사이에 두고 암거미가 끈적이는 가로줄을 거둬 모질게 제 몸에 감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5

from text 2008/01/07 20:06
물빛에 비친 행성은 아름다워 보였다. 남자가 다른 세상을 사는 동안 여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었다. 작은 행성은 돌기를 멈추었고 세상은 잠시 정지하고야 말았다. 이윽고 누군가 낮게 토하던 한숨을 남자는 들었을까. 지키던 별들은 제집으로 갈 시간을 지켰으며, 물빛 속에 노랗게 빛나던 달은 다시 하얗게 바랬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돌에 새긴 믿음이나 약속도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법, 애초에 바람에 새겼던들, 가볍게 새겼던들. 남자의 잠꼬대 같은 중얼거림에 여자는 눈물 대신 붉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남기 위해 한사코 웅크리던 때가 있었지. 세상을 흘끔거리던 그때, 산처럼 나를 누르던 것은 나였어. 해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 마지막 남은 황금처럼 빛났지만, 눈이 멀고 있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작은 행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있으며 할 수 없는 일이란 얼마나 있을까. 마음에 기대 몸서리치는 마음이 갈 자리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남자는 마른 손을 들어 허공에 놓았다. 딱 죽을 것만 같던 마음도 작은 흔적으로 갈무리된다지요, 산다는 일은 그 흔적을 후벼 파고서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겠지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것은 낯익은 여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이제야 오랜 되새김을 마칠 때가 온 것일 뿐, 오랜 되새김이 비로소 시작된 것일 뿐. 죽은 줄 알았던 해바라기들이 행성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소리들이 살아나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4

from text 2007/12/20 23:31
모래 위에 모래로 쌓은 탑 같은 거였어. 예뻤냐고? 술잔을 놓으며 남자가 말했다. 그때 내가 볼 수 있는 건 나를 보는 나밖에 없었어. 여자가 잔을 채웠다. 낮게 깔렸던 꽃잎처럼 잠시, 여자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언제나 짧은 여생, 생업이든 사랑이든. 모든 별들이 나무 틈으로 집중하였으므로 노랗게 치장하던 달은 술잔 아래 숨고 말았다. 여자는 낮게 깔리는 꽃잎을 따라 천천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술잔이 놓였던 자리에 슬몃 물기가 스몄다. 나무 틈으로 비를 머금은 새떼가 가득 날아들었다. 소란한 시간이 왔군. 남자는 오랜 그리움인 양 여자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모래를 두 숟가락이나 먹었더니 배가 불러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진흙으로만 한 공기를 거뜬히 비웠답니다. 찰진 똥을 누었더랬지요. 새처럼 지저귀며 여자는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그리움을 만졌다. 별의 나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나이보다 적은 걸요. 여자가 꿈결 같은 머리칼을 더듬는 동안 남자는 다음 세상을 보고 있었다. (계속)

남자와 여자 3

from text 2007/12/15 12:08
남자와 여자는 소리 없는 찻집에 마주앉았다. 주인도 시중꾼도 없었다. 해바라기 모양을 한 시계만이 움직이는 물체였다. 나를 닮은 딸을 낳아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내가 없더라도 당신을 잘 보살필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그 전에 나를 떠나면 당신을 죽여 버릴 거예요. 왼손 검지 손톱을 살짝 들어 바닥을 기는 이를 지그시 누르는 의지보다 간단히, 찍 소리도 없이 가볍게. 그때, 남자는 믿었을까? 이 작은 행성보다 더 작은 체구가 전하는 다짐을. 다른 별들이 돋기 시작했을 때, 함께 나무 틈에 가 숨기 전에 남자가 말했다. 오늘은 꽃잎을 띄운 맑은 술을 한 잔 하고 싶군. (계속)

남자와 여자 2

from text 2007/12/13 15:04
길을 걷다, 남자가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당신의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행성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당분간, 아무도 이 별을 찾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창백한 해바라기들이 남자를 보고 웃고 있었다. 하얗게 바랜 저 달은 당신을 닮았군,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해는 지레 길게 이울었지만, 어디에도 그림자는 없었다. 이 별 어디에도 이제 누군가 남겨놓은 흔적은 없어 보였다. 물론,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계속)

남자와 여자

from text 2007/12/12 21:38
가슴이 콩콩여 가슴에 손을 얹었더니 심장, 그 바닥까지 닿았네
가만히 손 위에 올려놓고 보니 나를 응시하는 두 눈동자
물끄럼한 서슬에 희미한 웃음만 흘렸네, 꾸깃꾸깃 제자리에 넣어두었네

남자는, 그랬다. 바깥 구경 한번에 온 세상을 알아버린 듯, 제집에서 날뛰다 두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그럼, 여자는? 희죽, 죽을 쑤어 제 머리를 덮어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개에게나 주라고? 아나, 받아라. (어떤 행성 이야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