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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과 나는 2021/05/20

당신과 나는

from text 2021/05/20 08:06
당신과 나는 1980년 5월 16~17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21:00에, 당시 발효 중이던 비상계엄령을 5월 18일 00:00부터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다고 발표하기 전인 17:30경,

우리 둘은 동 회의장으로 난입한 공수부대의 체포를 피해, 23:50경까지 동 대학 교정 내 어느 건물(현재 수영장이 설치된)의 지하보일러실 귀퉁이의 좁고 추운 공간에 갖혀 지독한 공포에 시달리다 5월 18일 0시 직전에 천운으로 탈출한 경험을 공유한 사이입니다.

그날로부터 41년째인 오늘 2021년 5. 18 우리 둘은 60대 중반 중노인이 되었습니다. 난 아직도 그대의 이름, 출신 대학도 모르고 심지어 얼굴조차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키가 약 175~180센치 정도이고 마른 체형이었던 것만 떠오릅니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보시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신촌역 앞 광장에서, 나는 90도 우측으로 꺾어 도주했는데 당신은 어느 방향으로 튀었는지를 적시하여 아래 이메일 주소로 연락주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2021년 5월 18일자 한겨레신문 생활광고에 실린 글.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 듯하여 옮겨둔다. 다른 시기의 이야기이지만 그 옛날의 이화여자대학교도 떠오르고 그때의 사람들도 생각난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바싹 말라 여기저기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던 어떤 청춘도.

* 하루 전인 5월 17일 같은 지면에 같은 내용으로 짧고 투박한 글이 먼저 실렸고, 하루 뒤인 5월 19일 서로의 안부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깊은 사연이야 알 길이 없으나 다행한 일이다. 이화여대 진입로에서 시작한 내 기억의 길은 서강대 뒷산과 서울대 강의실을 거쳐 전남대 운동장과 조선대와 연세대 학생회관, 경희대 교정까지 이어졌다. 흔적은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구나. 올해는 여름이 더디고 봄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