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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비가 나풀나풀 2022/10/22

나비가 나풀나풀

from text 2022/10/22 17:18
간혹 한두 잔만 먹고 더는, 적어도 한 백여 일은 술을 퍼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사나흘, 굳게 결심하고 굳게 실행하고자 애를 써서 그렇겠지, 벌써 백 일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몸도 한참 술이라곤 안 마신 것처럼 가볍고 정신도 가을 하늘처럼 드높고 맑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까. 서른을 갓 지났을 어머니와 굽이진 이십여 리 고갯길을 걸은 적이 있다.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이었을 것이다. 힘이 들어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쉴 때 나비 두어 마리가 나풀나풀 앞서 날아갔다. 혼자 속으로 좀 태워 주거나 등 좀 떠밀어 주지 그랬던가, 어머니는 신을 벗어 손에 들고 내처 걸었다. 외가 아랫마을 한 집에서 물을 얻어먹으며 보았던 스텐 세숫대야에 헤엄치던 자라는 이상하리만치 생생한데, 이후 기억이 없다.

가을이 한창이니, 가을도 다 갔다. 책을 산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노태맹의 시집 이팝나무 가지마다 흰 새들이. 산문집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태맹이형은 정말 잘 늙어가고 있구나. 다음은 시집 뒤에 실린 시인의 산문 레퀴엠, 천사의 시학만은 아닌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단락과 맨 마지막 문단. 시집은 전체가 하나의 레퀴엠이요, 하나의 커다란 시였다.

빛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물속을 밝게 할 수는 없다. 물이 밝아지는 것은 물들이 맨살 전체로 햇살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빛의 무한 거리를 물이 꺾어 주면서, 그리하여 빛이 무한에서 유한에로의 꺾임을 통해 반짝임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사물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그 무한을 유한의 몸으로 견딤으로써 빛을 드러낸다. 생이 죽음을 견뎌내고 받아들임으로써 빛나는 것처럼. 무한은 유한에 종속된다. 이제 무한의 빛은 유한한 우리의 것이 된다. 시는 이 물과 같다. 그러나 나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로 한정 짓고 자기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한의 빛이 유한의 물 표면에 부딪힐 때의 그 섬광을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아름다운 붉음은 늘 나타나고 있는 상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라짐이 자주 더 아름다운 붉은빛을 띠기도 한다. 사라지는 모든 이들이, 그리고 나도,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