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에 해당되는 글 5건

  1. 아버지의 역사 2022/10/29
  2. 남루한 흔적들 2022/10/25
  3. 나비가 나풀나풀 2022/10/22
  4. 가을은 짧고 2022/10/11
  5. 성주호 2022/10/02

아버지의 역사

from text 2022/10/29 01:02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따뜻함과 해학이 있다. 남도 사투리의 정겨움 속에 어쩐지 슬픔과 아픔이 있으며, 물 흐르듯 읽히는 중에 저도 모르게 웃고 울게 된다. 웃으며 울거나 울면서 웃게 된다. 사람의 도리와, 사람이 무어며 사람이 산다는 게 무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글을 쓰겠다는 허망을 한때 치기로 알고 진작에 그만두기를 얼마나 잘했나 싶다. 어쩐지 마음이 시린 작중 한 대목.

낮잠에서 깨어난 나를 다음 날 아침이라고 원껏 곯린 아버지는 잔뜩 뿔이 난 내 손에 햇살처럼 고운 홍옥 한알을 건네주었다. 이가 시리도록 새콤한 홍옥을 베어 물며 돌아오던 신작로에는 키 큰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산들거렸다.

읽으면서 우일문의 시시한 역사,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았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역사가 될 오늘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내일이라고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진짜는 드문 법이다. 밤이 깊다. 자꾸 뭔가를 놓고 싶은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남루한 흔적들

from text 2022/10/25 18:48
고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한 아버지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 옷가지며 책, 노트, 소지품들을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 뒤늦게 어머니가 교과서 서너 권을 겨우 건졌다. 그날따라 이상한 살기 같은 걸 느끼고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 나는 골목길에서 기름통을 들고 오던 아버지를 보고 그대로 뛰어 달아나 나중에야 불탄 사실을 알았다. 그길로 친구놈 손에 끌려 마지못해 다시 집과 학교에 돌아오기까지 오십 일을 넘게 밖에서 생활하였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카드, 여러 습작물과 기록이 있는 노트, 각종 유인물들을 후미진 캠퍼스 한 곳에서 몽땅 태웠다. 당시로서는 잡힐 것을 각오하고 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불탄 것에도 무어 대단한 것이야 있었겠냐마는 역시 훗날 아쉽고 그리울 때가 많았다.

며칠 전 무얼 좀 뒤지다가 1992년 5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쓴 일기를 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나마 잠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줄기차게 술을 마신 일과 함께 비루하고 가련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독서의 흔적과 보아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오래 잊고 있던 서울과 부천에서의 생활, 좌골신경통, 잠시 취업한 동해프로테인, 성주 초전에서의 노가다, 제록스 영업, 이츠야미, 다시 학교를 다닌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그 사람들과 그 세계, 어쩐지 작고 여린 나를 볼 수 있었다.

술과 사람들에 얽힌 남루한 흔적들, 가끔 이 블로그의 지난 글들을 보며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래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어쩌면 나는 한때 다른 말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만.

나비가 나풀나풀

from text 2022/10/22 17:18
간혹 한두 잔만 먹고 더는, 적어도 한 백여 일은 술을 퍼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사나흘, 굳게 결심하고 굳게 실행하고자 애를 써서 그렇겠지, 벌써 백 일은 족히 지난 것만 같다. 몸도 한참 술이라곤 안 마신 것처럼 가볍고 정신도 가을 하늘처럼 드높고 맑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까. 서른을 갓 지났을 어머니와 굽이진 이십여 리 고갯길을 걸은 적이 있다.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이었을 것이다. 힘이 들어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쉴 때 나비 두어 마리가 나풀나풀 앞서 날아갔다. 혼자 속으로 좀 태워 주거나 등 좀 떠밀어 주지 그랬던가, 어머니는 신을 벗어 손에 들고 내처 걸었다. 외가 아랫마을 한 집에서 물을 얻어먹으며 보았던 스텐 세숫대야에 헤엄치던 자라는 이상하리만치 생생한데, 이후 기억이 없다.

가을이 한창이니, 가을도 다 갔다. 책을 산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노태맹의 시집 이팝나무 가지마다 흰 새들이. 산문집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태맹이형은 정말 잘 늙어가고 있구나. 다음은 시집 뒤에 실린 시인의 산문 레퀴엠, 천사의 시학만은 아닌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단락과 맨 마지막 문단. 시집은 전체가 하나의 레퀴엠이요, 하나의 커다란 시였다.

빛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물속을 밝게 할 수는 없다. 물이 밝아지는 것은 물들이 맨살 전체로 햇살을 받아들이면서부터이다. 빛의 무한 거리를 물이 꺾어 주면서, 그리하여 빛이 무한에서 유한에로의 꺾임을 통해 반짝임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사물들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그 무한을 유한의 몸으로 견딤으로써 빛을 드러낸다. 생이 죽음을 견뎌내고 받아들임으로써 빛나는 것처럼. 무한은 유한에 종속된다. 이제 무한의 빛은 유한한 우리의 것이 된다. 시는 이 물과 같다. 그러나 나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로 한정 짓고 자기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한의 빛이 유한의 물 표면에 부딪힐 때의 그 섬광을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아름다운 붉음은 늘 나타나고 있는 상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라짐이 자주 더 아름다운 붉은빛을 띠기도 한다. 사라지는 모든 이들이, 그리고 나도, 이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가을은 짧고

from text 2022/10/11 14:25
겨울은 길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돌이키지 않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은 돌아가지 않는다. 가을은 짧다. 구린 열매를 먼저 떨어뜨리고 색을 조금 바꾼 나무는 번식이나 증식에 관심이 없고, 바람에 질린 꽃들은 바람 따라 바람처럼 나부낀다. 해가 진다. 남에서 북으로 신천을 따라 걷다 희망교를 건너 어디 면 소재지에서나 볼 법한 술집으로 들어선다. 삼겹살과 돼지찌개를 팔고 밥값은 따로 받지 않는다. 멸치 우린 된장찌개도, 잘 익은 김치와 방금 무친 콩나물이나 신선한 푸성귀도 다 거저다. 달무리가 진다. 갱도에서는 불을 꺼야 빛이 보인다고 한다. 글쎄, 다 같이 불을 끌 수 있을까. 저기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하나둘 불을 끄고 있는 것일까. 가을은 짧고, 갈 길이 멀다.

성주호

from text 2022/10/02 19:02
성주호 둘레는 오르내리는 길이 많았다. 부교 주위에는 새끼 물고기가 가득하였고 곳곳에 젊은 낚시꾼이 있었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미늘 없는 바늘이 떨어졌다. 무심한 파문은 건너편에 닿았고, 그늘진 맥문동 밭은 온통 까만 열매들로 반짝였다. 더운 햇볕과 서늘한 바람이 들고 나며 임무를 교대하고 있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 다녀온 게 얼마만인가. 잘 따라온 둘째 녀석, 먼 길 운전한 0124님이 고맙다. 길을 나설 때부터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였다. 연휴 가운데 일요일, 한중망이어도 망중한일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