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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의 선물

from text 2007/06/26 01:27

아직도 여전히 즐거움을 마음껏 드러내기엔 조심스럽고 두려운 구석이 있다. 거창하게 세상이나 누가 아픈데 외면하는 것 같아 그런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표낼 만한 이유를 찾기도 어려웠고 그럴 일이 잘 없었을 뿐 아니라 있어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즐거움을 즐길 줄 몰랐던 탓이 큰 것 같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그랬겠지만 이십대의 팔팔 끓던 시절이 그립고 될 수만 있다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공상을 많이 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안정감을 갖고 세상을 제대로 살피며 즐기게 되었다는 그래서 다시 그 어지럽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끔찍할 것 같다는 누군가의 전언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고 이제야말로 산다는 것에 솔직해지고 뭔가 알 것도 같은 기분에 자주 휩싸인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인지 몸으로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다들 걸어갔을 생각을 하면 어째 숙연해지는 게 역시 세상은 함부로 나댈 일이 아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부쩍 느끼던 터였다. 당장 술자리가 마냥 즐겁다기 보다 걱정이 앞서고 마시고 난 다음의 증상이 좀 심상찮다. 그러게 몸이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아는 것이고 아파야 더 잘 알 수 있는 건 틀림없는가 보다.

0124님이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매일 한 시간 일찍 마칠 뿐더러 한 주에 두 번씩 하던 야근도 한 번으로 줄었다. 출퇴근 거리도 확 줄었으며 연봉도 조금 올랐다. 서류 전형에 면접까지 거치는 동안 내색 한 번 않아 합격 통지를 받은 날에야 알았다. 일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그 쪽에서는 제일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는 델 찾아서 좋고 무엇보다 시간이 좋아 좋다. 업무도 상당히 비중있는 걸 맡은 모양이다. 생각할수록 잘 된 일이다. 근래 가장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세상을 바꾸려다 안 되어 차츰 영역을 줄여 바꾸려 노력하나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뒤늦게 나를 바꿨으면 주변을 바꾸고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텐데 하고 탄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허나 단언컨대 다시 태어나도 다르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습성을 바꾸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곰곰 생각해보고 다시 태어난다면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진짜 곰곰히 생각해 보고 지금부터 앞으로 다르게 살 일이다. 사랑은 참 지속하기 어려운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다른 많은 것들처럼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살을 맞대고 살다보면 말이야 쉽지만 그게 또 어려운 일인데, 한 동안 별 이유도 없이 서로 예민해져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곤두세우곤 했던 일이 바람 잦듯 잦고 나니 이렇게 평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다. 그렇게 간단한 곳에 실마리가 있고 누구나 아는 곳에 해답이 있는데 말이다. 늘상 그렇듯 또 모르는 일이기는 하나 크게 하나 배웠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년 정도 쓴 휴대전화기가 몇 번 시름시름하더니 영 가고 말았다. 남들 다 하는 번호이동은 하기 싫고 기기변경을 하자니 돈이 아까워 주변에 중고품이라도 없나 수소문하던 차에 한 모임에서 알고 지내는 늘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고운 분으로부터 새 물건을 거저 받게 되었다. 운영하는 대리점이 멀어 퀵서비스로 받았는데 직접 보고 골랐으면 돈이 꽤 들더라도 이걸 선택하지 않았겠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선불 퀵서비스로 악세사리까지 꼼꼼히 챙겨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기기를 만지는 손이 다 떨렸더랬다. 아무 기능 필요 없고 그저 작았으면 좋겠다 했는데 나중에 집에 와 자세히 만져보니 카메라 기능까지 숨어 있어 한 번 더 놀랐다. 순수한 호의에 기분이 들떠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갚나 즐거운 고민이다.

* 자다 말고 모기한테 대여섯 군데 물리고는 잠이 깨었다. 다시 잠 드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눈 속에 깊이 박혀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스무살이 좀 지났을 때일 것이다. 적지 않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예전 제일극장과 아카데미극장 사이 육교 위에서 우산도 없이 엎드려 구걸을 하는 한 아이에게 남루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비를 맞으며 걸어오다 그 아이를 일으켜세우곤 손에 바지 앞주머니에서 꺼낸 시퍼런 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던 모습이다. 그는 아이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돈을 받지 않자 거칠게 주머니에 찔러주고는 아이의 등을 잠시 떠밀며 밥이라도 사 먹으라 욕지기를 뱉듯 뱉어내곤 몇 번 비틀거리며 육교 아래로 사라졌다. 한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아이의 생생한 눈동자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