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12건

  1. 첫눈 온 날 아침 2008/12/07
  2.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2008/09/05
  3. 작곡 2008/07/25
  4. 라이카 2008/07/15
  5. 마흔 2008/05/17
  6. 사랑 때문에 2008/05/10
  7. 몸살 2008/02/10
  8. 다시, 사랑 2007/10/19
  9. 사랑 5 2007/10/13
  10. 모기의 선물 2 2007/06/26
  11. 그대가 준 잔을 내가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소 2007/03/21
  12. 여름, 휴가 2006/08/11

첫눈 온 날 아침

from photo/D50 2008/12/07 06:44
첫눈 온 날, 그저께 아침, 전혀 생각 못하고 있다가 쏟아지는 눈발에 일없이 설레고 반가웠다. 서연이는 나무마다 꽃이 핀다고 좋아하였다. 저녁에는 올 첫 송년회 자리, 무어 그리 보낼 게 많고 아쉬울 게 있다고, 내친 김에 사차까지 내달렸더니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온다. 누적된 알코올 때문이겠지, 요즘 몸뿐만 아니라 부쩍 정신도 마음도 약해졌다. 다음은 0124님의 전언.

급하게 손톱 끝 봉숭아물을 확인하고
아직도 남은 봉숭아물에 흐뭇해하는

과연 너의 첫사랑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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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from text 2008/09/05 11:40
생물체들은 서로 다르다. 새로이 번식된 생물체들은 그것들을 낳아준 모체들과 다르며, 새로 태어난 생물체들은 그것들대로 서로 다르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 다르다. 어떤 존재가 태어나, 사건들을 겪다가 죽는다면, 출생, 사망을 포함한 그의 사건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사건들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은 본인뿐이다. 그는 혼자 태어나며,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으며, 거기에는 단절이 있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할 경우 상대방을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미친 듯한 열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얼핏 본 연속감에 기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세상에 인간적 한계를 무너뜨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연인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방탕의 개념에 결부시키는 방법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시는 상이한 에로티즘의 형태가 마침내 이르는 곳, 즉 상이한 사물들이 뒤섞이는, 불명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시는 우리를 영원성에 이르게 하고, 시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연속성에 도달케 한다. 시는 영원이다.

죠르쥬 바따이유의 <에로티즘> 서문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에로티즘' 중에서. 예전에 <註釋, EROTISM>이라는 제목으로, 서문 중에서 고른 어떤 대목 하나 다음에 짧은 이야기, 다른 대목 하나 다음에 연이은 이야기, 또 다른 대목과 이어지는 이야기, 식으로 소설 쓰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쓸만한 대목들만 골라놓고 이야긴 도입부만 겨우 끼적이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발상은 괜찮았고, 돌아보면 그리운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엔 딱 죽거나 죽이고 싶었을 뿐인, 그런 때이지만.

* 잘 짜여진 다시 읽어도 좋을 괜찮은 단편이나 중편소설 하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수필 서너 편, 울림 있는 시 몇 편 같이 엮어서 책 한 권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래 그런 거지 하며 웃으며 서럽잖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작곡

from text 2008/07/25 14:29
오늘 아침 일이다. 일어나자마자 멜로디언을 꺼내 건반을 두드리는 녀석을 달래가며 밥을 먹이려는데, 언뜻 봐도 복잡한 음표들을 잔뜩 그려놓은 공책을 보며 치고 있는 것이었다. 어딘가 있는 걸 옮겨놓은 거냐, 네가 쓴 거냐 물으니 제가 썼단다. 엊저녁 '일지매' 마지막 회 보느라 정신 팔려있을 때 공책을 펴놓고 뭔가를 열심히 쓰기에 글씨 연습하는 줄 알았더니 이걸 쓰고 있었나 보다. 볼펜으로 오선지를 긋고 음표 아래에 계이름도 군데군데 적어놓은 게 (본 적은 없지만)전문가의 습작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높고 빠른 템포의 곡으로 보였다. 어린 작곡가(?)의 즉흥연주까지 들었으나, 그리 매끄럽지 않은데다 들어도 뭘 잘 모르는 귀를 가진 탓에 별 큰 감흥은 없었다. 유치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떤 연주가 떠올라 써 본 건지, 쓰고 싶은 대로 쓰고 연주해 본 건지 물었더니, 예쁜 음악이 생각나서 쓴 거란다. 아무렴, 창작이 아니라 어디서 들은 걸 어설프게 베껴본 것이라 하더라도 나에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이 물난리를 겪는 와중에도 홀로 쨍쨍한 폭염주의보를 발하더니 마침 내리는 단비가 반갑다. 녀석의 말 곧이곧대로, 누가 뭐래도 녀석의 첫 작곡인 거다.

* 얼마 전에는 피아노학원에서 집으로 걸어오며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있다. 대뜸 '서연이도 몰라요' 하더니, 나중에는 '한마음콜 택시가 좋아도 다른 택시도 타는 거예요' 한다. 그렇지, 뭐든 하나만 그리 좋을 수 있나, 하다가, 택시 사랑이란 저와 같아야 하는가, 소리 내어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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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

from text 2008/07/15 15:48
그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쓰다듬고 만지고 작동시킬 수 있다. 여전히 마음대로 부릴 수야 없지만 나를 위해 나름의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 같이 처음 저도 나를 길들일 때 느꼈을 나의 배려를 잊지 않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대체로 내가 상대를 좋아할 때는 그도 나를 좋아하기만을 바라지만, 그도 나를 좋아할 때는 그 크기와 성질을 재고, 울고 웃는다. 한 발 먼저 다가가기를 겁내지만 한 발 물러날 때는 냉큼 한 발 다가가고 만다. 우리도 그랬다. 다만 다 가질 수 없다는 분명해 보이는 사실이 더 가지려는 욕망을 적절히 제어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이 독특한 거리는 저와 나를 우리일 수 있게 하지만 언제든 우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낮은 자리에 맞출 수밖에 없는 처지가 높은 교감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선 자리가 늘 불안한 것이다. 사람들은 직립보행 이후 많은 걸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의심과 질투와 질병을 얻었다. 마주보는 사랑을 하고부터 사랑을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태초처럼 가늘게 반응한 이래 때때로 그와 내가 서로에게 감응하던 반짝이는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저와 나는 저와 나의 도덕으로 충분하였다. 하지만 언제든 손끝을 놓아버리거나 손끝에서 달아나는 꿈을 지속적으로 꾼다는 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낡고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골병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해석에 실눈을 치뜨다 이어지는 길이 이어지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늘 그랬듯,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게나, 앙상한 이름으로만 남지는 않을, 나의 특별한 친구.

마흔

from text 2008/05/17 12:49
뭐든 마음껏 즐길 수 없는 나이, 일부러 무언가에 몰두하는 나이
남아있는 젊음과 열정을 되살려 기어코 소진하고 마는 나이, 어제
과음한 다음 날, 살진 짐승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온통 하얗게 바랜 채 내려앉은 겨울 하늘을 만났다.
문득, 세상이 그렇게 작고 예쁘게 보일 수 없었다.
일상에서 잘 지내는 사람들과
여전히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세상은 여전했다. 제 방식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정답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석양이 보고 싶다. 운명을 닮은 석양, 며칠 그것만 보다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는, 사랑을 꿈꿔 왔나 보다.
더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변치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나 보다.
꾸미고 가꾸는 만큼의 거리와 긴장을 유지한 채
편리와 일상을 버린 채
불가능을 두드렸나 보다.
철이 들면 단순해진다는데,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놓질 못하겠다.

사랑 때문에

from text 2008/05/10 23:04
사랑 때문에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죽으려, 죽으려 해봤던 사람의 다음 사랑은 치열할까, 단정할까. 바람이 분다. 언제 세상이 한번 다른 세상이었던 적이 있냐고, 다른 세상을 보여 주마던 바람이, 흔들고 흔들리던 그 바람이 묻고 있다. 여전히 이 세상은 그 세상이었고, 그녀는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루이 말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데미지' 마지막 대사. 이게 일종의 반어로 쓰일 수도 있는 줄 몰랐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간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 법, 그러나 어디에도 심장을 내어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그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많은 게 달라졌다. 저무는 마음, 저무는 몸에 한 줄 칼날이 지난다.

* 오월 초부터 삼십도를 웃돌며 제멋대로 날뛰던 더위가 주춤하다. 그저께 밤부터 선선하던 바람이, 가을인 듯, 가슴에 실금 하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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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from text 2008/02/10 13:14
지독한 목감기를 앓았다. 몸살 기운과 목감기 기운이 조금씩 있더니 차가운 술과 맥주를 마신 다음날부터 끙끙 앓았다. 목에는 다른 사람이 사는 듯 낯선 소리가 나왔고 때때로 그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혼자 동네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나오는데 스물다섯 즈음 은행에 처음 계좌를 개설하였을 때처럼 처음 하는 일인 듯 떨리고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더랬다. 일월 말부터였는데 다 나은 듯 하더니 어제 오후부터 몸살 기운이 도지고 목 전체가 퉁퉁 부어 아프다. 설날 저녁 처가 식구들과 많이 마신 술이 뒤늦게 화근인가, 조금 무리하여 피곤한 걸 제때 풀어주지 않고 한 차례 더 무리하면 영락없이 앓는 나이가 된 건가, 속절없이 웃고 만다. 연휴는 길고 마흔으로 가는 통과의례가 독하다.

처고모, 처고모부들과의 설날 술자리에서 오고간 둘째를 낳아야지, 아니 하나에 정성을 다 쏟는 게 낫다는 이야기에서 뻗어간 생각의 가지들은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자식을 위해 살 것인가, 그게 과연 둘인가를 거쳐 사랑의 속성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사랑이란 무한히 샘솟는 것이어서 배우자든 자식이든 늘어나는 대로 듬뿍듬뿍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정된 것이어서 이전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소홀해지는 것인가.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속성을 보여줄 것인가.

모든 걸 거는 사랑이 아름다운 진짜 사랑인가, 적당히 사랑할 줄 아는 게 현명한 진짜 사랑인가. 인생이란 것의 굴곡과 서로 간의 소통불가능성, 시간의 무시무시한 속성에 생각이 이르면 선뜻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가 하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게 정답이라는 말과 같다. 해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진술은 모두 진실이고 진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때때로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순간과 무시로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머리 속의 지식이나 갈고 닦은 지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몸이 반응하여 먼저 움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힘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누적된 모든 것, 말하자면 어린 시절 무지개색 나비를 본 일이나 아무도 몰래 잠시 하늘을 날아올랐던 일, 어느 날 밤 슬쩍 세상 한 자락을 들춰본 일까지 다 포함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드문드문 내 반쪽이 둥둥 떠다니며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꿈을 꾼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이전의 나는 아니지만,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시, 사랑

from text 2007/10/19 13:24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저 뒷모습이 보였을 뿐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아무런 약속은 없어도 서로가 기다려지겠지요 행여 소식이 들려올까 마음이 묶이겠지요
어쩌면 영원히 못 만날까 한번쯤 절망도 하겠지만 화초를 키우듯 설레이며 그 날을 기다리겠죠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모든 것 그대로 간직해요 다시 우리가 만나는 날엔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해바라기의 '지금은 헤어져도'가 며칠째 머릿속에 뱅뱅 돈다. 방배동 카페에서는 비틀즈의 미셸과 함께 일부러 신청해 듣기도 했다. 계속 소리 내어 흥얼거리다보면 다음 세상도 틀림없이 있을 것 같고, 벌어먹고 사는 일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충만한 기분이 불안하다. 문득, 김수영의 '사랑'이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사랑

from text 2007/10/13 08:46
아껴야겠다. 시간이나 사람은 몰라도, 술은.

* 오래된 퀴즈 하나. 'O끼고 O하는 게 사랑이다'의 O에 들어갈 말은? 알고 나면 당연한 것 같지만 맞히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정답은 아, 위. 그러게 이제야 이들을 더 사랑하려 할 따름인 게다. 마치 섬광이 일듯 '술을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긍정적 사고의 힘인가, 평화가 흐르고 힘이 불끈 솟는다. 기특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 벤을 기리며 오랜만에 잭콕을 먹고, 그리운 소주를 먹었다. 잘 가, 벤.

모기의 선물

from text 2007/06/26 01:27

아직도 여전히 즐거움을 마음껏 드러내기엔 조심스럽고 두려운 구석이 있다. 거창하게 세상이나 누가 아픈데 외면하는 것 같아 그런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표낼 만한 이유를 찾기도 어려웠고 그럴 일이 잘 없었을 뿐 아니라 있어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던 건지도 모른다. 사실 즐거움을 즐길 줄 몰랐던 탓이 큰 것 같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그랬겠지만 이십대의 팔팔 끓던 시절이 그립고 될 수만 있다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공상을 많이 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안정감을 갖고 세상을 제대로 살피며 즐기게 되었다는 그래서 다시 그 어지럽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끔찍할 것 같다는 누군가의 전언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고 이제야말로 산다는 것에 솔직해지고 뭔가 알 것도 같은 기분에 자주 휩싸인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인지 몸으로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다들 걸어갔을 생각을 하면 어째 숙연해지는 게 역시 세상은 함부로 나댈 일이 아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부쩍 느끼던 터였다. 당장 술자리가 마냥 즐겁다기 보다 걱정이 앞서고 마시고 난 다음의 증상이 좀 심상찮다. 그러게 몸이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아는 것이고 아파야 더 잘 알 수 있는 건 틀림없는가 보다.

0124님이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매일 한 시간 일찍 마칠 뿐더러 한 주에 두 번씩 하던 야근도 한 번으로 줄었다. 출퇴근 거리도 확 줄었으며 연봉도 조금 올랐다. 서류 전형에 면접까지 거치는 동안 내색 한 번 않아 합격 통지를 받은 날에야 알았다. 일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 그 쪽에서는 제일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있는 델 찾아서 좋고 무엇보다 시간이 좋아 좋다. 업무도 상당히 비중있는 걸 맡은 모양이다. 생각할수록 잘 된 일이다. 근래 가장 기쁘고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세상을 바꾸려다 안 되어 차츰 영역을 줄여 바꾸려 노력하나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뒤늦게 나를 바꿨으면 주변을 바꾸고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텐데 하고 탄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허나 단언컨대 다시 태어나도 다르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습성을 바꾸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곰곰 생각해보고 다시 태어난다면 다르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진짜 곰곰히 생각해 보고 지금부터 앞으로 다르게 살 일이다. 사랑은 참 지속하기 어려운 감정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다른 많은 것들처럼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살을 맞대고 살다보면 말이야 쉽지만 그게 또 어려운 일인데, 한 동안 별 이유도 없이 서로 예민해져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곤두세우곤 했던 일이 바람 잦듯 잦고 나니 이렇게 평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다. 그렇게 간단한 곳에 실마리가 있고 누구나 아는 곳에 해답이 있는데 말이다. 늘상 그렇듯 또 모르는 일이기는 하나 크게 하나 배웠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년 정도 쓴 휴대전화기가 몇 번 시름시름하더니 영 가고 말았다. 남들 다 하는 번호이동은 하기 싫고 기기변경을 하자니 돈이 아까워 주변에 중고품이라도 없나 수소문하던 차에 한 모임에서 알고 지내는 늘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고운 분으로부터 새 물건을 거저 받게 되었다. 운영하는 대리점이 멀어 퀵서비스로 받았는데 직접 보고 골랐으면 돈이 꽤 들더라도 이걸 선택하지 않았겠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선불 퀵서비스로 악세사리까지 꼼꼼히 챙겨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기기를 만지는 손이 다 떨렸더랬다. 아무 기능 필요 없고 그저 작았으면 좋겠다 했는데 나중에 집에 와 자세히 만져보니 카메라 기능까지 숨어 있어 한 번 더 놀랐다. 순수한 호의에 기분이 들떠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갚나 즐거운 고민이다.

* 자다 말고 모기한테 대여섯 군데 물리고는 잠이 깨었다. 다시 잠 드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눈 속에 깊이 박혀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스무살이 좀 지났을 때일 것이다. 적지 않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예전 제일극장과 아카데미극장 사이 육교 위에서 우산도 없이 엎드려 구걸을 하는 한 아이에게 남루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비를 맞으며 걸어오다 그 아이를 일으켜세우곤 손에 바지 앞주머니에서 꺼낸 시퍼런 만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던 모습이다. 그는 아이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돈을 받지 않자 거칠게 주머니에 찔러주고는 아이의 등을 잠시 떠밀며 밥이라도 사 먹으라 욕지기를 뱉듯 뱉어내곤 몇 번 비틀거리며 육교 아래로 사라졌다. 한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아이의 생생한 눈동자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오랜만에 집중해서 영화를 보았다. 맨 앞 부분부터 보지 못하고 케이블채널 MBC무비스를 통해 티브이 화면으로 봤지만 장면장면이 그림이라 꼼짝하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장쯔이에게서는 더욱 눈을 뗄 수 없었다. 펑 샤오강 감독의 야연(夜宴).

기억에 남는 전언. 가장 독한 독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이유에 대해 가면을 쓰지 않으면 얼굴로밖에 희로애락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대답, 그리고 마지막 즈음 독배를 들고 죽어가는 황제의 대사 '그대가 준 잔을 내가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소'.

여름, 휴가

from text 2006/08/11 01:11
짧은 술자리가 불러온 상념들.

처한 환경에 따라 그럴 수 있겠지, 봄은 겨울이 끝나서, 여름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 나른함이 싫어서, 여름은 너무 더워서, 어쩔 수 없어서, 가을은 아아 너무 짧아서, 떨어지는 그 잎들이 너무 아쉬워서 그럴 수 있겠지, 겨울은 춥고, 어떤 날,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갈 데란 게 그리 많은 게 아닌데, 그럴 수 있을까, 이것도 다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희망찬 생각을 해 보자고, 봄은 이른바 만물이 돋아나고, 추운 겨울이 가고, 여름은 자라날 대로 자라나고, 따사로운 햇살을 우리가 알게 하고, 가을은 여름이 가고, 아아 여름이 가고, 사는 보람을 일으키고, 기다리는 겨울을 기다리고, 겨울은 움츠리고, 예비하고, 모이고, 사랑하는데, 아아, 이렇게 다 사랑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한 번 돌이키면 다 사랑할 수 있는데, 지금, 이, 여름만은, 이것만은 도무지 어쩔 수가 없구나. 너무 더워 어쩔 수가 없구나. 그 때문에 사랑하던 나머지도 다 어쩔 수가 없구나.

어제부터 시작한 여름휴가. 어제는 하루 종일 빈둥대고(티브이를 통해 살인의 추억과 쇼생크 탈출을 번갈아 보았으며, 김규항의 나는 왜 불온한가와 마찬가지로 웹에서 다 읽은 줄 알면서 구매한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와 심심풀이 땅콩인 줄 알고 산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들추다 말다 하였다), 오늘은 망설이다 외출을 감행하였다. 볼 영화가 없어 헤매다 중앙시네마에서 '한반도'를 예매하고 교보문고엘 잠시 들렀다. '제일서적'이 완전히 없어진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충격이었다. 촌놈마냥 예전 로얄호텔 건물을 한참이나 올려다봤더랬다. 문태준의 새 시집과 미시마 유키오를 만났다 라는 소설이 기억에 남는다. 윤후명의 돈황의 사랑이 둔황의 사랑으로 문지에서 새로(?) 나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읽었던 죽음의 한 연구(내가 읽은 죽음의 한 연구는 옛날 종화형 자취방에서 무작정 뽑아 들고온 것이었다. 그 책이 눈에 띈 것은 기억하건대 세계의 문학에 오늘의 작가상을 받아 실린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고서였다. 절대 돌려주지 않으리라 마음 먹고 오래 갖고 있다 몇 번 독촉받고는 돌려주고 말았다) 개정판을 살까 말까 잠시 망설였으며, 통로까지 차지하고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삼 놀랐다.

한반도 흥행이 괴물에 뒤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강우석은 완성도에 대해서만은 관객들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깨우쳤을까. 과도한 캐스팅이 눈에 띄었으며, 교전권을 부여받는 제독과 대통령의 무전에서는 찬 에어컨 바람을 무색케 할만한 전율이 일었음을 고백한다.

지나치기 전에, 소통, 연결, 연대, 이렇게 적고 보니 그 옛날 술친구 생각도 난다마는, 그 한 사람을 안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도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이란 말인가. 아아 십년도 넘은 그 시절 그와 같은 이야길 내뱉은 그녀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