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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을, 문득 2 2009/10/03
  2. 로드 2008/11/17

가을, 문득

from text 2009/10/03 23:07
나에겐 결정권이 없어.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에서. 추석 연휴 전날, 벼르던 이사를 했다. 결혼하고 다섯 번째 집. 일이 되려니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을 만큼 일이 맞물려 돌아가 한편 내몰리듯이 일이 진행되었다. 주공에서 미분양 아파트를 매입하여 임대하는 것으로, 첫째가 내년에 갈 초등학교는 거리가 좀 있어 아쉽지만 두 사람 직장이나 둘째를 봐주시는 어머니 댁에서 두루 가까워 좋다. 곱절 가까운 전세금에다 새로운 공간에 맞춰 거실에 소파며 책장을 들이고 낡은 세탁기를 바꾸고 아이 방에 침대와 책걸상, 책장 등을 놓으니 모양은 그럴듯한데 먹고사는 일이 새삼스럽다. 무릇 십만 원을 쓸 때 고민하던 것이 만 원 한 장 쓸 때 고민하게 되면 그것을 쓸 때 누리는 혜택과 즐거움은 물론, 더러 만 원, 십만 원이 생겼을 때 얻는 기쁨 또한 열 배는 될 터, 이제야 벌고 쓰는 재미를 제대로 배우려나 모르겠다만.

이달 말이면 이 별에서 꼬박 마흔 해를 보내게 된다. 빤히 치어다보는 가을, 문득 묻어나는 얼굴이 바람처럼 맵고 흐리다.

로드

from text 2008/11/17 23:53
며칠 코맥 매카시의 로드에 빠져있었다. 절반은 Eleni Karaindrou의 Elegy of the Uprooting과 함께, 절반은 그마저도 없이. 도저한 절망과 많은 시들이 있었고, 예언과 사랑이 있었다. 아버지로서, 하나의 생물체로서 나는, 우리는 무엇인가, 무엇일 수 있는가 끊임없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로드의 잿빛과 맞물려 그런가, 갈수록 찬 바람은 어찌 이리 서글프기만 한지 모르겠다. 돌돌돌돌 구르는 죽은 잎들의 소리. 그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더 스산한 일인지. 다시 책을 펼치며 손에 집히는 대로 그 세계의 편린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여름 드레스의 얇은 천 너머로 스타킹 끝 부분이 느껴진다. 이 장면을 고정시켜라. 이제 어둠과 추위를 내려달라고 해라. 저주를 받아라.

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는 소년이 불을 지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의 불을 뿜는 용. 불꽃들이 위로 솟구쳐올라 별이 없는 어둠 속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한 말이라고 모두 진실은 아니야. 이 행복은 그 터전이 사라졌다 해도 변함없이 진짜야.

리볼버에는 총알이 한 알만 남았다. 네가 진실과 직면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저 사람들이 널 발견하면 그래야 돼. 알았지? 쉬. 울면 안 돼. 내 말 들려? 어떻게 하는지 알지. 그걸 입 안에 넣고 위를 겨냥해. 빨리 세게 해야 돼. 알았지? 울지 말라니까. 알아들었지?

지금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위험하게도 이 횡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에도 했던 말을 했다. 행운이란 이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했다.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길에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