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

from text 2010/03/10 23:05
밤새 많은 눈이 내렸다. 삼월 적설량으로는 기상관측 이래 두 번째로 많은 양으로 오십삼 년 만의 기록이라는데, 9.5센티미터가 넘게 쌓였다고 한다. 출근길, 730번 버스는 종점까지 가지 못하고 큰길에서 차를 돌렸고 우산이나 휴대 전화를 들고 사람들은 엉금엉금 기었다. 어린 시절 수학여행에서 만난 설악산의 눈이 생각났다. 금세 세상이 이렇게 온통 하얘질 줄 누가 알았으랴. 더는 배울 줄 모르는 무리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것만 같았다. 눈밭을 구르는 아이들과 받드는 나무들이 예뻤다.

봄눈은 봄눈이었던가. 오후의 짧은 볕에도 세상은 너무나 빨리 사라져버렸다. 퇴근길에는 꿈을 꾼 듯 먼 옛일처럼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재작년 11월에 사다놓고 표지도 구성도 마음에 안 들어 던져두었던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며칠 동안 읽었다. 김연수가 문득문득 떠올랐으나 그와 달리 불쾌한 구석은 없었다. 엄청나게 재미있고 믿을 수 없게 서정적이었다. 특히 여섯 번째 구 이야기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랑은 고백이 아니라 행위일 것이다. 소통도 언어가 아니라 몸짓일지 모른다. 어쩔 수 없는 독법일런가. 내내 오스카와 서연이가 겹쳤고, 나는 오스카가 되었다가 서연이가 되었다가 하였다. 물론 토머스도 되었고 슈미츠가 되기도 하였다. 거기 눈길에 미끄러져 가련한 내 사랑이 부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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