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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지개 2 2009/09/06
  2. 어쩌면 3 2009/07/27

무지개

from photo/D50 2009/09/06 07:49
공이치기가 공이를 때리는 순간, 몹시도 엄숙한 그 무엇이 가슴을 스치면서 긴지는 삶과 죽음의 유사와 일치를 본다. 자신은 항상 저승을 바라보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다. 그곳을 향해 자진하여 온몸과 온 영혼을 맡기려고 하는 순수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긴지는 경악한다.

이 녀석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현세에 존재하는 데 대한 망설임이 깊구나. 지나친 감수성에 휘둘려 본능의 노리갯감이 되고 있구나.

긴지는 애용하던 무기를 죽은 노인에게 인심 썼다. 만일 하늘의 처벌에 굴복하고 싶지 않거든 그걸로 한 방 먹여주시라. 아니면 저 세상에서도 허무하기만 하거든 그걸로 다시 한번 죽으시라. 총알은 아직 충분하다. 두 사람 분은 충분히 되니까 이번에는 부부가 나란히 목숨을 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지개란 이윽고 없어지는 운명을 가진 것이다. 빛의 띠가 찬연할수록 더 빨리 사라진다는 데 무지개의 참된 가치가 있다. 하늘 높이 걸려 있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보는 이들은 선명한 인상을 받게 된다.

마루야마 겐지의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에서 몇 대목. 꽤나 오랜 시간 힘들게 읽었다. 번역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가, 물론 잘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원문에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충실한 번역이 아니었을까 고쳐 생각하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과 같은 번역자였다. '금각사'와 달리 그 책도 꽤나 재미없게 읽은 기억이 난다. 분량을 절반 정도로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고, 마루야마 겐지는 역시 집요하고 무서운 정신의 소유자란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백주 대낮의 긴지, 마코토, 하나코, 조각룡, 가면, 저승사자, 바다거북, 검은지빠귀, 그리고 울새와 큰유리새, 같으면서 다르고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들을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다. 봄 병풍까지 읽고 놔둔 '달에 울다'는 좀 쉬었다 읽어야 할 듯.

* 김은성의 '내 어머니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까지 대부분 세대가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남자인 나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도 알 수도 없었다. 여자가 여자인 어머니로부터 또는 시어머니로부터 이어내리는 질긴 이야기들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사회나 집단으로부터 마초스러움과 억지, 배타적 욕망들은 잘 배워왔겠지만 말이다. 여성성의 긍정적인 대목들을 마주하다 보면 때로는 그 부정적인 대목들을 깡그리 잊고 그 세계에 살고만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한다. 가련한 일이다.

* 첫 이발 후 동자승 같은 율짱. 뒤통수도 예쁘다. 아비나 형이 갖고 있는 제비초리도 없고 그처럼 깎아지른 절벽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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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from text 2009/07/27 23:18
된통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싫은 건 싫고, 잡문을 잡스럽게 쓰거나 행동에서든 언사에서든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라치면 이후론 거들떠도 안 보곤 했었는데, 사실 이제는 그런 기억조차 잊고 먹고사는 일인데 다들 절로 이해도 되고 그렇게 헤아리는 것이 또 나이를 제대로 먹는 것도 같았는데, 스스로 꼬락서니가 우습기도 하고 가련키도 하다. 헛살기까지야 했겠냐 싶으면서도 무언가를 놓치고는 그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더 늦기 전에 이렇게라도 떠밀린 것이 천만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와 소설집 여름의 흐름을 읽고 든 생각이다. 되풀이 읽는 동안 이대로 살면 될까, 그래도 좋을까, 나중에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문집을 먼저 읽어서인지(습관처럼 때때로 번갈아 읽어서인지) 데뷔작인 여름의 흐름 한 작품을 빼곤 산문에서의 얼굴이 내내 소설 속에 디밀어져 반갑고 무섭고 때로 참혹했다. 장편을 두어 권 골라 그의 세계에 더 오래 침잠할까 싶다.

소설가의 각오는 한참 전에 보고 놓아두었다 소설집을 읽으며 다시 꺼냈던 것인데 읽는 맛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억지스러움도 느끼고 닿지 못할 세계를 추구하는 아집도 느꼈던 것이 이번엔 치열한 정신과 굳건한 육신을 만나는 긴장과 즐거움을 한가득 느꼈으니 말이다. 소설에서는 무언가 제대로 벼린 느낌,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것(무거우나 매력적인 정서랄까, 시적 집요함이랄까, 잘 모르겠다)을 만난 느낌을 잔뜩 받았다. 따로 떼어 한 대목을 고를 수 없는 유형의 글들이라 소설에서도 몇몇 심장을 찌르는 대목을 옮기다 말고, 소설가의 각오에서 한 대목과 거기에 실린 인터뷰 중에서 한 대목만 옮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나간 자리만이 지나간 것들을 반추할 뿐이다. 어쩌면.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카드에 기대를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열어본다. 흔해빠진 카드라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방법이 훨씬 강하다.

미시마 유키오가 마흔다섯 살 나이로 죽었을 때, 나는 아직 젊었죠. 그래서 이런 일도 마흔다섯 살이 되면 진력이 나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막상 마흔다섯 살이 되고 보니, 그 사람은 왜 겨우 마흔다섯에 포기하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문학 자체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문학 주변에 떠도는 아지랑이 같은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 싶군요. 소설가의 재능이란, 소설 이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 벼르던 올림푸스 E-P1은 예판 때 시간 맞춰 주문 넣었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돌연 취소하고 말았다. 오늘 있은 500대 한정 판매 정발도 그냥 지나쳤다. 예판 주문 취소 후엔 짧은 후회도 있었지만 하도 달려들 드니 흥미도 애정도 반감되어 파나소닉 후속 기종이나 20mm 1.7 나올 때까지라도 미뤄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