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해당되는 글 21건

  1. 테러리스트, 대나무 2006/06/20
  2.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2006/06/17
  3. 남해금산 2006/06/17
  4. 맨발 2006/06/14
  5. 처음 2006/06/14

테러리스트, 대나무

from text 2006/06/20 18:39
나는 테러리스트올시다
광합성 작용을 위해
잎새를 넓적하게 포진하는 치밀함도
바위 절벽에 뿌리내리는 소나무의 비장함도
피침형 잎새로 베어 날리는
나는 테러리스트

마디마디 사이에 공기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 공기를 구출하러 오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하늘을 점거해 나아가는
나는 테러리스트

나의 건축술을 비웃지 말게
나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자유롭고 싶은 공기의 욕망과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공기의 살의와
포로로 잡힌 공기의 치욕으로
빚어진 아,
공기, 그 만져지지 않는
허무가 나의 중심 뼈대
나는 결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그래야 비곗살을 버릴 수 있는 법

나는 테러리스트
내 나이를 묻지 말게
뒤돌아 나이테를 헤아리는 그런 감상은
바람처럼 서걱서걱 베어먹은 지 오래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
변절처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
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
그래, 이 독한 마음으로
한평생 머리 굽히지 않고 살다가
황갈색 꽃을 머리에 이고
한 족속 일제히 자폭하고야 말
나는 테러리스트


함민복의 시 '대나무' 전문. 이렇게 남의 글 전문을 옮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냘 수도 있겠다만, 뭐 그럴래믄 그러라고 대꾸하기도 하고, 찔리기는 하는군 하고 반성도 하고,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냐며 발을 살짝 들어올려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지.

머꼬네 놀러갔다가 '나는 테러리스트'(란 단어)를 보고.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 심장 속 새집의 열쇠를 빌려드릴께요.

내 몸을 맑은 시냇물 줄기로 휘감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몸 속을 작은 조약돌로 굴러다닐께요.

내 텃밭에 심을 푸른 씨앗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당신 창가로 기어올라 빨간 깨꽃으로
까꿍! 피어날께요.
엄하지만 다정한 내 아빠가 되어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너그럽고 순한 당신의 엄마가 되드릴께요.

오늘 밤 내게 단 한 번의 깊은 입맞춤을 주시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에 예쁜 아이를 낳아 드릴께요.

그리고 어느 저녁 늦은 햇빛에 실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
저무는 산 그림자보다 기인 눈빛으로
잠시만 나를 바래다 주시겠어요?

그러면 난 뭇별들 사이에 그윽한 눈동자로 누워
밤마다 당신을 지켜봐드릴께요.


최승자의 시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전문. 김수영 이래 이성복, 기형도 등과 함께 최고의 노래를 불러준 사람. 그를 빠뜨릴 순 없을 것 같다.

남해금산

from text 2006/06/17 11:50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 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사랑하는〉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뒷표지글.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놀라운 시들로 가득차 있다. 아니 그 시집 자체가 놀랍다고들 이야기한다. 박남철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시를 쓰기도 했다. '어떤 자식일까 -- 이성복을 발견하고'


나는 오늘 오래간 만에 우표를 사려고 책가게엘 들렀다가 며칠 전에 혼자서 어디 고독이나 좀 씹어보려고 들어갔던 다방에서 송창식이의 '가나다라'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거의 두어 시간 동안 가게 주인의 눈총까지 받아가며(천 오백원이 마침 주머니에 없었기에 남의 시집을 돈 주고 사는 실수는 다행히 저지르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드는가'ㄴ지 뭔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감히, 이따위 엉터리 시집을 낸 놈은 아예 아무도 몰래 없애 버려야만 된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면서 가슴에 슬쩍 칼처럼 품고 책가게를 나왔었다

젠장, 송창식이 자식이야 뭐 딴따라니까 뭐 내 영업에 그다지 큰 지장을 초래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엉터리 천재 비슷한 자식을 앞으로 더 오래 살려 두었다간, 두고 두고 후회스러울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맨발

from text 2006/06/14 17:11
김수영의 '서시'를 옮기고 보니, 최근에 본 시 중 가장 와닿은 문태준의 '맨발'이 생각난다. 최근이래봤자 여섯달도 넘은 것 같지만, 반성하는 의미도 있고 하여.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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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from text 2006/06/14 16:58
처음 시작할래니 떠오르는 글. 김수영의 '서시'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나는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은 명령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그리고, 불가의 말씀.

"얻었다 한들 원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원래 없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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