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금산

from text 2006/06/17 11:50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 당신을 처음 알았을 때, 당신이라는 분이 이 세상에 계시는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여러 날 밤잠을 설치며 당신에게 드리는 긴 편지를 썼지요.

처음 당신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이 왔을 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히 밀려오는 기쁨에 온몸이 떨립니다. 당신은 나의 눈이었고, 나의 눈 속에서 당신은 푸른 빛 도는 날개를 곧추세우며 막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요. 그때만큼 지금 내 가슴은 뜨겁지 않아요. 오랜 세월, 당신을 사랑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허술한 사내인가를 뼈저리게 알았고, 당신의 사랑에 값할만큼 미더운 사내가 되고 싶어 몸부림했지요. 그리하여 어느덧 당신은 내게〈사랑하는〉분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왜 내가 자꾸만 당신을 떠나려 하는지를. 사랑의 의무는 사랑의 소실에 다름아니며, 사랑의 습관은 사랑의 모독일테지요. 오, 아름다운 당신, 나날이 나는 잔인한 사랑의 습관 속에서 당신의 푸른 깃털을 도려내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당신이 한껏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떠남으로써만......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뒷표지글.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놀라운 시들로 가득차 있다. 아니 그 시집 자체가 놀랍다고들 이야기한다. 박남철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시를 쓰기도 했다. '어떤 자식일까 -- 이성복을 발견하고'


나는 오늘 오래간 만에 우표를 사려고 책가게엘 들렀다가 며칠 전에 혼자서 어디 고독이나 좀 씹어보려고 들어갔던 다방에서 송창식이의 '가나다라'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거의 두어 시간 동안 가게 주인의 눈총까지 받아가며(천 오백원이 마침 주머니에 없었기에 남의 시집을 돈 주고 사는 실수는 다행히 저지르지 않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드는가'ㄴ지 뭔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마침내, 감히, 이따위 엉터리 시집을 낸 놈은 아예 아무도 몰래 없애 버려야만 된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리면서 가슴에 슬쩍 칼처럼 품고 책가게를 나왔었다

젠장, 송창식이 자식이야 뭐 딴따라니까 뭐 내 영업에 그다지 큰 지장을 초래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엉터리 천재 비슷한 자식을 앞으로 더 오래 살려 두었다간, 두고 두고 후회스러울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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