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흔적들

from text 2022/10/25 18:48
고등학교 3학년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 게 못마땅한 아버지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내 옷가지며 책, 노트, 소지품들을 마당에서 다 태워버렸다. 뒤늦게 어머니가 교과서 서너 권을 겨우 건졌다. 그날따라 이상한 살기 같은 걸 느끼고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선 나는 골목길에서 기름통을 들고 오던 아버지를 보고 그대로 뛰어 달아나 나중에야 불탄 사실을 알았다. 그길로 친구놈 손에 끌려 마지못해 다시 집과 학교에 돌아오기까지 오십 일을 넘게 밖에서 생활하였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나 카드, 여러 습작물과 기록이 있는 노트, 각종 유인물들을 후미진 캠퍼스 한 곳에서 몽땅 태웠다. 당시로서는 잡힐 것을 각오하고 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때 불탄 것에도 무어 대단한 것이야 있었겠냐마는 역시 훗날 아쉽고 그리울 때가 많았다.

며칠 전 무얼 좀 뒤지다가 1992년 5월부터 1999년 5월까지 쓴 일기를 보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나마 잠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줄기차게 술을 마신 일과 함께 비루하고 가련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었다. 독서의 흔적과 보아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오래 잊고 있던 서울과 부천에서의 생활, 좌골신경통, 잠시 취업한 동해프로테인, 성주 초전에서의 노가다, 제록스 영업, 이츠야미, 다시 학교를 다닌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 그 사람들과 그 세계, 어쩐지 작고 여린 나를 볼 수 있었다.

술과 사람들에 얽힌 남루한 흔적들, 가끔 이 블로그의 지난 글들을 보며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래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평생에 걸쳐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어쩌면 나는 한때 다른 말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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