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에게

from text 2023/10/24 04:50
나는 세월을 다 보았노라.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거나 햇살이 일렁이는 것, 인간들의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과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을. 도토리를 감추는 다람쥐도 다람쥐를 노리는 올빼미도 늘상 진지할 일은 아니었다. 이파리를 떨구는 무리도, 썩은 이파리에 알을 까던 풍뎅이도. 서로 잡아먹거나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인간들도. 나는 다시 오는 세월과 다시 오지 않는 세월을 다 보았느니, 뿌리가 가지처럼 하늘에 닿고 가지가 뿌리처럼 세속에 닿았다. 두 손 모아, 合掌.

* 지난 14일 단체로 속리산 세조길에 다녀왔다. 나무와 길이 좋았고 수정암 아래 계곡이 좋았다. 속리에 감흥이 일어 뒤풀이 자리에서 건배사로 육행시를 읊었다. 속세를 떠났으나 떠나지 못한 자의 이야기로되 다시 보니 떠나지 않았으나 이미 떠난 자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속리산에 와 /리별한 여인을 생각하누나 /산은 언제나 말이 없건만 /세월만 야속하여라 /조용히 잔을 드노니 그대여 /길이길이 행복하시라

* 5년 5개월 이어 오던 물생활을 접었다. 아끼는 유목 두 점만 남기고 생물과 물품들을 모두 0124님 지인에게 넘겼다. 시원섭섭한 게 이런 기분이구나. 휑한 거실 탁자에 유목 두 점 올려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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