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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재미 2008/09/05
  2.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2008/09/05

가재미

from text 2008/09/05 12:44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의 시 '가재미' 전문. 시간을 두고 몇 번을 읽어도 '파랑 같은'에서는 울컥, 하고 만다. 별일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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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from text 2008/09/05 11:40
생물체들은 서로 다르다. 새로이 번식된 생물체들은 그것들을 낳아준 모체들과 다르며, 새로 태어난 생물체들은 그것들대로 서로 다르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 다르다. 어떤 존재가 태어나, 사건들을 겪다가 죽는다면, 출생, 사망을 포함한 그의 사건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사건들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은 본인뿐이다. 그는 혼자 태어나며,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으며, 거기에는 단절이 있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할 경우 상대방을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미친 듯한 열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얼핏 본 연속감에 기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세상에 인간적 한계를 무너뜨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연인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방탕의 개념에 결부시키는 방법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시는 상이한 에로티즘의 형태가 마침내 이르는 곳, 즉 상이한 사물들이 뒤섞이는, 불명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시는 우리를 영원성에 이르게 하고, 시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연속성에 도달케 한다. 시는 영원이다.

죠르쥬 바따이유의 <에로티즘> 서문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에로티즘' 중에서. 예전에 <註釋, EROTISM>이라는 제목으로, 서문 중에서 고른 어떤 대목 하나 다음에 짧은 이야기, 다른 대목 하나 다음에 연이은 이야기, 또 다른 대목과 이어지는 이야기, 식으로 소설 쓰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쓸만한 대목들만 골라놓고 이야긴 도입부만 겨우 끼적이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발상은 괜찮았고, 돌아보면 그리운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엔 딱 죽거나 죽이고 싶었을 뿐인, 그런 때이지만.

* 잘 짜여진 다시 읽어도 좋을 괜찮은 단편이나 중편소설 하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수필 서너 편, 울림 있는 시 몇 편 같이 엮어서 책 한 권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래 그런 거지 하며 웃으며 서럽잖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