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에 해당되는 글 8건

  1. MP3 2 2008/09/28
  2. 체제 깊숙이 2008/09/27
  3. 먼저 가서 4 2008/09/10
  4. 득병유시 치병유시 2008/09/08
  5. 가재미 2008/09/05
  6.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2008/09/05
  7. 사계 2008/09/04
  8. 어린 시절 2008/09/03

MP3

from text 2008/09/28 23:28
일요일 아침, 쌀쌀한 날씨에 뒤늦게 보일러 불을 지피고는 거실 바닥에 혼자 등 기대고 누워 MP3를 들었다. 꽃다지의 '민들레처럼'에서, 쓴물처럼 사랑처럼 넘어오는 걸 울컥하고 삼켰다. 귀에 꽂고 음악을 들을 때면, 이도 적응이 되려나, 감정선이 말할 수 없이 예민해져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 고등학교 때 동아리 여름 수련회엘 가서 텐트에 누워 친구가 건네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국화를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세상과 단절되어 혼자 어떤 비릿한 슬픔 같은 걸 느꼈던 기억, 마구 쿵쾅거리던 가슴을 잊을 수 없다. MP3 플레이어 장만을 망설였을 때에는 장사익의 뽕짝 절창을 듣고 참을 수 없어 술을 이었던 기억도 한몫 했었다. 먹고 싶은, 먹을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들이 생길 것인가. 어제 아침엔 새로 잠을 청하며 김윤아의 앨범 '유리가면'을 듣다 바닥 아래로 꺼져들고 말았다. 차츰 가슴이 뻑뻑하게 조여 오더니 뻐개지듯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차오르는 눈물을 거둘 뿐, 뼛조각이 해체된 듯 꼼짝 못하고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잠이 들어 오래 헤맸다. 오늘 낮잠에서 깼을 때도 그랬지만, 일어났을 때에는, 한세상 보내버린 듯 먹먹하면서도 지금 바깥에 내리는 가을비처럼 어딘지 맑고 살뜰한 마음이 돌았다.

* 언제 한번, 비 오는 날 차안에서 음악을 들을 때,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무딘 귀를 잠시 틔워주기도 하나 싶다.

* 월요일 퇴근길, 용기(?)를 내어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는 MP3를 들으며 걸었다. 단절의 느낌은 아니군, 몰입도 잘 안 되는데? 풍경을 보는 맛이 섬세한 것도 같고, 길을 건널 때, 그리고 아는 사람을 만날까, 아직까진(!) 자주 두리번거리게 되는구나, 서연이 녀석 다니는 피아노 학원이 이리 가까웠나, 했다.

넣어놓고 두고두고 들을 음악을 고르다가는(기기 등록 이벤트로 마음껏 받아 일정 기간 동안 들을 수 있는 무료 서비스를 받았는데, 들어보고 좋으면 간직하려고 한달 백오십 곡을 구천구백원에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하였다) '추억 여행'을 하는 기분에 빠졌다.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어떤 장면, 어떤 공간이 얽힌 것들에 우선 손이 갔다. 양희은의 '가난한 마음'과 '내 님의 사랑은'을 찾아 들을 땐 아, 하고 금세 스무 살 시절로 날아가기도 했다. 좋은 길동무가 생겼다. 간밤엔 세상이 한번 뒤채는 걸 느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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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깊숙이

from text 2008/09/27 01:20
이제야 가을이 왔나 했더니 겨울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준탱은 가고 술자리 후유증과 아쉬움만 남았다. 예정된 한두 자리만 지나면 확실히 좀 줄여야겠다. 잠시 끊는 것도 좋고.

난생 처음 MP3 플레이어를 샀다. 작고 예쁜 모양에 끌린, 삼성에서 새로 나온 YP-U4.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만 봐도 그것보단 그 공기와 주변을 관찰하고 즐기는 게 낫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길을 걸을 때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자신을 차단하고 고립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면서도 며칠 뭔가 지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 저지르고 만 것이다. 누구는 그러더라. 같은 풍경이 듣는 또는 들은 음악에 따라 달리 보인다고. 음악이 아니라도 어찌 같을 수야 있으랴, 하면서도 자동차처럼 그게 또 그렇구나 했다.

큰 건 하나 지를 예정인 건, 아파트다. 역시 세내는 것이지만 지금보다 많이 비싼데다 넓이도 많이 준다. 봐둔 아파트, 봐둔 평수가 결정을 미루는 동안 나가버려 아직 구한 건 아니지만 들어가면 식구들 모두 처음 살아보는 것이다. 지금 사는 곳 계약 기간이 일년여 남았으나 0124님 흔들리는 마음에 넘어가버렸다. 계획대로라면 다음달 말이나 다다음달 초엔 옮길 모양이다(그때쯤 입주 예정인 아파트, 부동산 말로는 다음달 초 입주 점검을 하고 나면 물량이 꽤 나올 거란다). MP3도, 이사도, 결정하고 나니 어딘가 허전하고 복잡하던 마음도 조금은 달래지고 나를 둘러싼 새 환경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품게 된다(음악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알 수 없다. 그만큼 기대도 되는 것이지만, 얼마나 가까이 할런지도 모르고. 다만, TV를 없애고 잡다한 짐들도 정리하고 잡생각도 좀 떨치고 무엇보다 깔끔하고 정리된 공간에 대한 기대는 하게 된다). 그러나 체제 깊숙이 편입하는 이 씁쓸한 기분이란. 언제든 탁 놓아버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건데, 어딘가 저당 잡히고 목매다는 이 꼼짝없는 마음이란.

내가 너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더는 너에게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꽃은 지고 마는 것, 더는 거꾸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곳에 포개져, 먼 훗날, 깊이 잠들 수 있기를.

* 서연이가 바둑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되었다. 유치원 종일반은 관두고 하원에 맞춰 동성초등학교(내가 입학했던 초등학교이다) 근처의 바둑 학원으로 갔다가 피아노 학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가족들이랑 부대끼고 자연을 호흡하며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안쓰럽다. 좋아하니 시킨다는 핑계로 어른들 욕심만 차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이 녀석이 제 엄마와 함께 프뢰벨영재창의성센터라는 데서 한국웩슬러유아지능검사라는 걸 하고 왔다. 아마도 좌뇌, 우뇌와 관계있을 성 싶은 언어성 소검사(상식, 이해, 산수, 어휘, 공통성)와 동작성 소검사(모양 맞추기, 도형, 토막 짜기, 미로, 빠진 곳 찾기)로 이루어진 건데, 각각의 점수로 언어성 지능과 동작성 지능을 산출하고 합으로 전체 지능을 산출한다고 한다. 결과를 보니 언어성 지능은 상위 0.4%, 동작성 지능은 21.2%, 전체 지능지수는 2%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언어성이 워낙 높아 비교적 평균치에 가까운 동작성을 합하여도 2% 이내에 든다는 것인데, 편차가 커 검사자의 우려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제 엄마가 바둑 학원엘 보낸 것인데, 잘 나가는 쪽 밀어주잔 건지 균형을 잡아보잔 건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바둑 용어를 구사하며 곧잘 덤비는데, 맨 처음 선생님께 들었다는 '이겼다고 좋아하지 말고 졌다고 속상해 하지 마라'는 거라도 잘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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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서

from text 2008/09/10 14:42
아니 누(gnu) 한마리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다가도 맹수의 배 밑에 깔리고 나서는 먼산을 보듯 순박하고 담담한 눈망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일까.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 화면이라 해도,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격렬히 몸부림치는 게 아닌, 그 어떤 한없는 순종이 나는 감동적이었다.

김곰치의 '발바닥, 내 발바닥'에서. 그 눈망울을 본 것 같지 않은가.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지 않는가. 그 눈망울이 빤히 바라다보는 것 같지 않은가. 한참 무연히 그 눈망울을 마주보다 '한번 가보는 것이다'에 가슴 일렁였던 원규형의 시 '먼 길'이 떠올랐다. '득병유시 치병유시'에 달아두려다 새로 올린다.

돌담 위의 굴뚝새야
앞 도랑의 버들치야

강 건너
산 넘어 간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그곳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한번 가보는 것이다

저승길이 대문 밖이니
인연이 다했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마라

먼저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
저 세상에
더 많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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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병유시 치병유시

from text 2008/09/08 23:41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오동은 천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조선 중기의 학자 신흠(申欽)의 채록 민담집 '야언(野言)'에 실려 있다 한다. 처음 매화만 알고 좋아했다 오동을 알고 같이 좋아했더니, 오늘 문득 떠올라 찾아보다 나머지 두 구절을 만났다. 피천득의 수필 '용돈'과 '순례'에 위 두 구절이 나오고, 김구 말년의 휘호에 아래 두 구절이 나온다는 것도. 그러다 만난 또 한 구절.

得病有時 治病有時(득병유시 치병유시) 병을 얻을 때가 있고, 병을 다스릴 때가 있다.

아하, 하고 출처를 뒤지다가 누구는 여기서 得詩有時 解詩有時(득시유시 해시유시)를 끌어내고, 누구는 得道有時 治道有時(득도유시 치도유시)를 끌어내는 걸 보았는데, 글쎄 다 그럴 듯해 보인다. 하긴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지라.

* 오늘 도착한 '지리산 편지'를 후딱 다 읽고 말았다. 좀체 한 권만 붙들고 쭉 읽질 않는데, '빛'도 그렇고, 둘 다 편지(?)라 그런가, 했다. 다음은 박규리의 시 '치자꽃 설화'. 이미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는데, 여기서 처음 보았다. 두 행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혼자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중 한 대목.

그리하여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 시간에 겨우 십 리를 가는 길이 얼마나 눈부신 속도의 길이며, 한 시간에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의 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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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from text 2008/09/05 12:44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의 시 '가재미' 전문. 시간을 두고 몇 번을 읽어도 '파랑 같은'에서는 울컥, 하고 만다. 별일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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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from text 2008/09/05 11:40
생물체들은 서로 다르다. 새로이 번식된 생물체들은 그것들을 낳아준 모체들과 다르며, 새로 태어난 생물체들은 그것들대로 서로 다르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 다르다. 어떤 존재가 태어나, 사건들을 겪다가 죽는다면, 출생, 사망을 포함한 그의 사건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사건들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은 본인뿐이다. 그는 혼자 태어나며, 혼자 죽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으며, 거기에는 단절이 있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소유하지 못할 경우 상대방을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이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미친 듯한 열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얼핏 본 연속감에 기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 세상에 인간적 한계를 무너뜨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직 연인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방탕의 개념에 결부시키는 방법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시는 상이한 에로티즘의 형태가 마침내 이르는 곳, 즉 상이한 사물들이 뒤섞이는, 불명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시는 우리를 영원성에 이르게 하고, 시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연속성에 도달케 한다. 시는 영원이다.

죠르쥬 바따이유의 <에로티즘> 서문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 에로티즘' 중에서. 예전에 <註釋, EROTISM>이라는 제목으로, 서문 중에서 고른 어떤 대목 하나 다음에 짧은 이야기, 다른 대목 하나 다음에 연이은 이야기, 또 다른 대목과 이어지는 이야기, 식으로 소설 쓰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쓸만한 대목들만 골라놓고 이야긴 도입부만 겨우 끼적이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발상은 괜찮았고, 돌아보면 그리운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엔 딱 죽거나 죽이고 싶었을 뿐인, 그런 때이지만.

* 잘 짜여진 다시 읽어도 좋을 괜찮은 단편이나 중편소설 하나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다운 수필 서너 편, 울림 있는 시 몇 편 같이 엮어서 책 한 권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래 그런 거지 하며 웃으며 서럽잖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사계

from text 2008/09/04 00:11
흔치 않은 성씨였다. 이름은 잊어버렸다. N이라고 해두자. 그 무렵 나는 한 문장만 빼도 바스러지는 촘촘하고 유리알처럼 투명한 소설이나 철학적 사유를 담은 시를 쓰고 싶어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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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from text 2008/09/03 22:24
어린 시절, 방학은 늘 시골 외가에서 보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시작하는 날 또는 그 이튿날 어머니와 함께 가서 개학 전날이나 전전날 돌아오곤 했다. 초등학교 육년을 내내 그렇게 보냈다. 나를 데려다놓은 그날이나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떠나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을 어귀 구판장 앞에서 동구 밖으로 멀어지는 어머니는 그 긴 길 위에서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기억이 맞다면 열두 번을 한결같이 그렇게 가셨다. 먹먹한 마음도 잠시, 곧 산으로 들로 개울로 못으로 잘도 돌아다니며 놀았지만, 사는 동안 문득문득 그 뒷모습은 가슴 서늘하게 출몰하곤 한다. 데리러오셨을 때면 저도 모르게 수다스럽고 들뜨던 어린 내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도 그런 내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정직하게 제 살 깎아먹는 법을 그때 배웠다.

대저 얼마 못 가는 마음들이, 그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떤 마음을 이루기도 한다. 이 녀석 오줌인들 못 먹을까 보냐 하다가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태산을 짓기도 하는 것이다. 더러는 색채가 없는 채색화, 먹을 쓰지 않은 수묵화를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살뜰한 휴식, 그 끝에서.

* 어제 저녁 조금 늦게 일을 마치고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과 정영태의 우주관측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바람이 좋아 일부러 멀리 돌아 집까지 걸었다. 날이 좋아지니 다시 산이 그립다. (우주관측을 서점에서 출판사에 주문하는 사이 이원규의 지리산 편지를 다른 서점에 주문하였다. 처음 사는 원규형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