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목감기를 앓았다. 몸살 기운과 목감기 기운이 조금씩 있더니 차가운 술과 맥주를 마신 다음날부터 끙끙 앓았다. 목에는 다른 사람이 사는 듯 낯선 소리가 나왔고 때때로 그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혼자 동네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나오는데 스물다섯 즈음 은행에 처음 계좌를 개설하였을 때처럼 처음 하는 일인 듯 떨리고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더랬다. 일월 말부터였는데 다 나은 듯 하더니 어제 오후부터 몸살 기운이 도지고 목 전체가 퉁퉁 부어 아프다. 설날 저녁 처가 식구들과 많이 마신 술이 뒤늦게 화근인가, 조금 무리하여 피곤한 걸 제때 풀어주지 않고 한 차례 더 무리하면 영락없이 앓는 나이가 된 건가, 속절없이 웃고 만다. 연휴는 길고 마흔으로 가는 통과의례가 독하다.
처고모, 처고모부들과의 설날 술자리에서 오고간 둘째를 낳아야지, 아니 하나에 정성을 다 쏟는 게 낫다는 이야기에서 뻗어간 생각의 가지들은 나를 위해 살 것인가, 자식을 위해 살 것인가, 그게 과연 둘인가를 거쳐 사랑의 속성에 대한 질문에 이르렀다. 사랑이란 무한히 샘솟는 것이어서 배우자든 자식이든 늘어나는 대로 듬뿍듬뿍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정된 것이어서 이전의 사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소홀해지는 것인가.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또 어떤 속성을 보여줄 것인가.
모든 걸 거는 사랑이 아름다운 진짜 사랑인가, 적당히 사랑할 줄 아는 게 현명한 진짜 사랑인가. 인생이란 것의 굴곡과 서로 간의 소통불가능성, 시간의 무시무시한 속성에 생각이 이르면 선뜻 한쪽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인생에 정답이 있는가 하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인생에 있어서는 모든 게 정답이라는 말과 같다. 해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상반되는 두 가지 진술은 모두 진실이고 진리인 경우가 허다하다. 때때로 인생에서의 결정적인 순간과 무시로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머리 속의 지식이나 갈고 닦은 지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몸이 반응하여 먼저 움직이거나 어쩔 수 없는 힘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누적된 모든 것, 말하자면 어린 시절 무지개색 나비를 본 일이나 아무도 몰래 잠시 하늘을 날아올랐던 일, 어느 날 밤 슬쩍 세상 한 자락을 들춰본 일까지 다 포함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드문드문 내 반쪽이 둥둥 떠다니며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꿈을 꾼다.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이전의 나는 아니지만,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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