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친구'에 해당되는 글 3건

  1. 기나긴 이별 2009/07/10
  2. 금언 2 2007/09/30
  3. 술친구 2007/07/21

기나긴 이별

from photo/D50 2009/07/10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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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부터 처음 주도를 단련하는 놈처럼 마셔대던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풍만한 유머와 거침없는 품격, 끊임없이 출현하는 술과 담배, 독립적인 인격들과 그만한 쓸쓸함이 넘치는 매혹적인 세계였다. 작가의 이름이 생판 낯설진 않다 했더니 책꽂이 한쪽 구석에 초기작 거대한 잠(The Big Sleep)이 있었다. 책 뒷날개의 메모를 보고 기억을 더듬으니 93년 12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와 함께 그 옛날 술친구에게 받은 책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이들이 바로 서점에서 그냥 들고 나온 책들인지도 모르겠다. 들어본 적 없는 출판사의 문고판에다 간략한 역자 소개조차 없어 번역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감흥 없이 읽고 그대로 그 소감을 전한 기억이 난다. 젠장, 이놈의 정신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뒤처지고 하잘것없기는 매한가진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유머를 보라.

그는 풀러사(옮긴이에 따르면 유명한 옷솔 회사란다) 직원이 관심을 보일만한 눈썹을 치켜떴다. / 빅터의 바는 너무나 조용해서 문 안에 들어설 때 기온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 분홍빛 머리의 참새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단지 참새만이 쪼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쪼고 있었다. / 염소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는 나를 살짝 쳐다보더니 그보다도 더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그 말고는 미동도 없었다. 더 나은 일을 위해서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모양이었다. / 그는 짧은 빨강 머리에 무너진 허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부인이 희미하고 덧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거의 침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문장들도 즐비하다. 53년 작품이다.

스스로 만든 함정만큼 치명적인 함정은 없다. / 세상의 모든 조용한 바에는 그렇게 슬픈 남자가 한 명씩은 있다. / 그때까지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알았을 겁니다. 대부분이라고 해야겠죠. 여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벌 한 마리가 나무 창문턱을 기어 다니며 피곤한 듯 가냘픈 소리로 윙윙거렸다. 이제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없으며, 자기는 끝장났고, 너무나 많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다시는 벌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 여자가 단지 어린 소녀였던 때도 한 번은 있죠. / 술꾼들은 교육이 안 돼, 친구. 그 사람들은 무너져버렸거든. / 기계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인간은 전화를 사랑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갔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 나를 사랑하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경쟁자가 없다는 거지. / 그렇지만 그때부터는 뭔가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는 강철 같은 정신의 1센티미터가. / 범죄는 질병이 아니에요. 단지 증상이지. /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내가 여자기 때문이고 여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언

from text 2007/09/30 22:07
어느 날, 한 여인이 간디를 만나기 위해 멀리서 간디가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그 여인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걸어왔는데, 간디에게 아들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쉬지 않고 설탕을 먹는답니다. 아이에게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고 수도 없이 이야기했지만 도대체 제 말을 듣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들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아이에게 설탕 좀 그만 먹으라고 말씀해 주세요." 간디는 그 아이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 어머니에게 열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때는 여름인데다 그 여인의 집은 아주 멀었기 때문에 여인은 크게 실망하면서 돌아갔다. 열흘 뒤, 그 여인은 아들과 함께 다시 간디를 찾아왔다. 간디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설탕이 몸에 좋지 않으니 설탕을 그만 먹으라고 말했다. 그 여인은 간디에게 고마워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간단히 한 마디만 해 주시면 되는데 왜 지난 번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건가요? 왜 다시 오라고 하신 거죠?" 그러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은 저도 지난 번까지는 설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참 사람 좋은 김용락 선생의 어떤 글에서 처음 읽은 건데, 사실 여부는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일화는 '知行合一', '言行一致'와 함께 항상 마음에 짓누르듯이 새기게 된다.

어제, 그제, 좋은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을 크게 꾸밈 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맙다. 오래 오래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오늘은 시간이 없어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오래 전 사다놓고 이제야 읽기 시작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어느 현처가 긴 편지의 말미에 덧붙인 유명한 양해의 일절이란다. 예쁘다.

술친구

from text 2007/07/21 13:48
술친구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거의 유일하게 여자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인데, 대학 동기생이지만 나보다 한 살이 많던가 그랬다. 이 친구는 서점에서 그냥 책을 들고 나오는 방면엔 선수였다. 그렇게 들고 나온 책을 몇 권 받기도 했다. 주로 동성로 뒷골목 지하 깡통 맥주집에서 쥐포를 뜯으며 술을 마셨는데, 그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게 분명한 깡통 쌓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마시다 보면 내가 먼저 쓰러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친구는 인간의 소통불가능성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잘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여간 그 친구 덕에 박인홍의 '벽 앞의 어둠'과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알았고, 빌린 그 책은 그 친구가 결혼할 때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라며 돌려주지 않았다. 아주 특이한 글씨체를 가진 친구였다. 일이학년 때 종종 어울리다가 어설픈 '사랑과 혁명'에 빠져 오래 보지 못하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친구가 결혼하기까지 한동안 만났다. 언젠가 길을 걷다 우연히 아기를 안고 가는 걸 보고 잠시 얘기 나눈 게 마지막이다. 그게 벌써 한 십여 년 되었다.

그리고 정호와 준탱이를 빼놓을 수 없다. 서너 살씩 적은 후배들이지만 참 많은 정을 쌓았다. 이들은 지금 너무 멀리 있다. 하나는 부천에서 바쁘게 살고 있고 하나는 (지금은 잠시 들어와 있지만) 대양을 떠돌고 있다. 떨어져 있고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이다. 언제나 그랬듯 다시 계전 앞 돌계단에서 함께 쓰러져 자고 싶다. 다리뼈 하나씩만 남기고 뼈째 통닭을 다 뜯어먹고 싶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런저런 핑계로 술잔을 나누고 싶다. 사람과 세상을 향한 숨은 열정을 확인하고 싶다.

나이가 들고 오랜 시간 술친구는 마달이었다. 그리고 후에 형석이가 합류하였다. 0124님처럼 지금도 만나는 술친구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닮은 구석이 없어 나랑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인연은 그랬다. 차곡차곡 술자리와 술병들을 쌓다보면 저릿하게 느껴오는 동질감이 있다. 섣부르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친구란 많지 않은 법이다. 다 다르고 하나만 비슷하여도 되는 그 하나를 가진 놈들이 많지 않은 까닭이다.

어제, 동해 바다를 잠시 보고 왔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가운데 바람에 일렁이는 바다에는 갈매기 몇 마리만 바빴다. 깊이 숨겨놓은 풍광인 듯 일행 몰래 나만 본 듯한 느낌을 간직하고 왔더랬는데, 돌아오고 나서도 좋은 술친구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에 그 바다, 그 갈매기처럼 계속 마음이 울렁이고 바빴더랬다.

* 아, 다 쓰고 보니 하맹이 빠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 후까지 줄기차게 같이 마셔댄 친구이자 진정한 박카스의 세계로 접어든 친구인데, 친구들끼리 몰래 간 이차, 삼차 자리를 귀신같이 찾아온다던지 파계를 앞둔 비구니 스님이랑 같이 술을 마신 이야기, 암자에 공부하러 가서는 처음에 술을 말리며 이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던 스님이 나중에는 이 친구에게 등을 내밀고 말았다는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온다. 내가 한번씩 잠시 동안 술을 끊겠다면 준탱이는 제가 좋아서 찾고 위로받을 때는 언제고 몸 좀 그렇다고 멀리 해서야 되겠냐며 일침을 놓곤 했지만, 정작 이 친구 앞에서 제가 술을 좀 사리다가는 '슬픈 생각을 해 보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들어야 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외상이 깔렸고 낡고 찌그러진 그 집들에서는 항상 그 친구가 들고 간 심수봉 언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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