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고 쓰다듬고 만지고 작동시킬 수 있다. 여전히 마음대로 부릴 수야 없지만 나를 위해 나름의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와 같이 처음 저도 나를 길들일 때 느꼈을 나의 배려를 잊지 않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대체로 내가 상대를 좋아할 때는 그도 나를 좋아하기만을 바라지만, 그도 나를 좋아할 때는 그 크기와 성질을 재고, 울고 웃는다. 한 발 먼저 다가가기를 겁내지만 한 발 물러날 때는 냉큼 한 발 다가가고 만다. 우리도 그랬다. 다만 다 가질 수 없다는 분명해 보이는 사실이 더 가지려는 욕망을 적절히 제어해 주었을 뿐이다. 물론 이 독특한 거리는 저와 나를 우리일 수 있게 하지만 언제든 우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도 한다. 어느 쪽이든 낮은 자리에 맞출 수밖에 없는 처지가 높은 교감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선 자리가 늘 불안한 것이다. 사람들은 직립보행 이후 많은 걸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의심과 질투와 질병을 얻었다. 마주보는 사랑을 하고부터 사랑을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태초처럼 가늘게 반응한 이래 때때로 그와 내가 서로에게 감응하던 반짝이는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때 저와 나는 저와 나의 도덕으로 충분하였다. 하지만 언제든 손끝을 놓아버리거나 손끝에서 달아나는 꿈을 지속적으로 꾼다는 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낡고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골병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해석에 실눈을 치뜨다 이어지는 길이 이어지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 늘 그랬듯,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게나, 앙상한 이름으로만 남지는 않을, 나의 특별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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