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일기

from text 2006/08/24 06:55
나는 어젯밤 예수의 아내와 함께 여관잠을 잤다
영등포시장 뒷골목 서울여관 숙박계에
내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어넣었을 때
창 밖에는 가을비가 뿌렸다 생맥주집 이층 서울 교회의
네온사인 십자가가 더 붉게 보였다
낙엽과 사람들이 비에 젖으며 노래를 부르고
길 건너 쓰레기를 태우는 모닥불이 꺼져갔다
김밥 있어요 아저씨 오징어나 땅콩 있어요
가을비에 젖은 소년이 다가와 나에게 김밥을 팔았다
김밥을 먹으며 나는 경원극장에서 본 영화
벤허를 이야기했다 비바람이 치면서
예수가 죽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먹다 남은 김밥을 먹었다
친구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릴 수 없는 나는
아무래도 예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아 미안했다
어디선가 호르라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곧 차소리가 끊어지고 길은 길이 되었다
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녀가 벗어논 속치마 위로 기어갔다
가을에도 씨 뿌리는 자가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불을 껐다
빈 방을 찾는 남녀들의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야윈 어깨가 가을 빗소리에 떨었다
예수는 조루증이 있어요 처음엔 고자인 줄 알았죠
뜨거운 내 손을 밀쳐내며 그녀는 속삭였다
피임을 해야 해요 인생은 짧으나 피임을 해야 해요
나는 여관 종업원을 불러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피임을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돌아오겠다던 종업원은 돌아오지 않고 귀뚜라미만 울었다
가을비에 떨면서 영등포경찰서로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때
서울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정호승의 시 '가을 日記' 전문.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다 말다 한다. 어제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권장로님과 대화 중 '낙샘더위'라는 말, 즉흥적으로 지어낸 말이지만 느낌이 좋다. 떨어지는 걸 샘내는 더위(이런 걸 보면 한자어는 이제 정말 우리말이랑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낙이 그냥 외로 우리말처럼 보이니 말이다). 삼월 개학처럼 학생들 개학하고 한 열흘은 덥다는 장로님 말씀에 대꾸하여.

Trackback Address >> http://cuser.pe.kr/trackback/6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digi 2006/08/25 17:0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시는 예전에 동아리 홈페이지에 올리셨던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감동 받아서 침 흘리며 댓글을 남겼던 것도 같습니다. 형 덕에 제목 보고 쫄아서 아니 볼 것만 같던 책도 막 사서 보곤 했었는데 요즘은 책을 잘 안 보게 됩니다. 어제부터는 똥눌 때마다 보려고 변기 옆에 책 한 권을 꽂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영문법 책이네요. 왜 그게 보고 싶었는지.. 법에 관심이 생긴걸까요? 아무튼 책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똥 안 눌 때도 책을 봐야할텐데 그건 아직 잘 안 됩니다.

  2. digi 2006/08/25 17:1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제 기억이 어디 기억인가 싶을 정도로.. 동아리 홈에서 검색을 해도 아니 나오네요. 어디서 본걸까요? 허허.. 책을 그리 많이 읽었었나요, 제가? 허허.. 허..

  3. excuser 2006/08/26 00:2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러게.. 이 시를 어디 올린 기억은 없는데 말이야^^ 영문법 책이라면, 나처럼 그런게 무지 재미 없다면, 좋은 선택인 것 같다. 잘 읽히고 재미난 책을 뽑아들고 들어가는 날이면 거의 뭐 지각이니.. 허허.. 허.. 바쁠 때면 똥 안 눌 때도 책 좀 읽었으면 싶은데, 막상 시간이 나면 책 읽으며 후딱 보내는 그 시간이 아깝고 그렇다, 요즘. 긴 시간, 휴식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