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세상

from text 2024/07/28 09:18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면 안다. 카메라 본체보다는 렌즈가, 렌즈보다는 필름이 결과물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찍는 사람이나 현상, 인화 과정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디지털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나 렌즈보다 후처리 과정이 결과물에 훨씬 크게 작용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후처리 작업이나 필름 등에 신경을 쓰기보다 렌즈나 카메라를 살펴보고 구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기꺼이 돈을 쓴다.

짧게나마 만년필의 세계에 들어와 노닐다 보니 생각난 얘기다. 만년필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필감과 결과물일 텐데 역시 펜보다 잉크가, 잉크보다 종이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사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아무튼 취미 생활이란 게 그것을 즐기는 데 필요한 장비나 도구를 살펴보고 고르고 지르는 재미를 빼놓고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기능을 떠나 관상을 목적으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으니.

여행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여행의 즐거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등산 장비를 고르고 등산 코스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과정이 모두 등산 생활인 것처럼, 만년필 세상도 구석구석 살펴보고 노는 재미가 있다. 정착이 어려운 세상이다. 펜도 그렇지만 잉크와 종이에 이르면 어마어마하다.

0124님에게 맛을 보라고 카웨코 클래식 스포츠 EF닙(뽑기 잘못으로 M닙 추가 구매)과 여러 잉크 카트리지들, 사무실에서 쓰려고 파이롯트 라이티브 F닙과 카트리지, 컨버터를 샀고, 파이롯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구매대행으로 커스텀 헤리티지 912 FM닙을 주문하였다. 잉크는 이로시주쿠 월야, 송로, 산밤, 죽림, 그리고 디아민 이클립스를 추가하였고, 우공공방의 원목 트레이와 양지사의 디루소 메모 패드 리필용 여러 권을 구입하였다.

사진기를 만지거나 물생활을 할 때도 그랬듯이 큰 세상 앞에서는 기가 죽어 딱 괜찮은 보급기나 중급기 기준에서 만족하고 나름 즐길 걸 안다. 타고난 소심함과 옹졸함이 어디 가겠나. 더 대형이나 고급으로는 가지 않는 저항선이 있다. 지를 건 어서 지르고 천천히 즐기면서 새 세상을 누리리라.

다음은 필사하다 다시 만난 고형렬의 시 '중' 전문.

어떤 시인도 나에게 콤플렉스는 아니다
나의 콤플렉스는 오직 이들뿐이다
소 똥과 오줌으로 약을 삼으며
남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로 옷 해입고
똥막대기에 해골을 꿰 어깨에 메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자가 못되더라도
나무 안경을 쓰고 어느 산골에
오직 경 하나와 옷 한벌로 세상을 보고
가만히 살아가는 겨울산과 같은
중, 그 중이 왜 이렇게 부럽게 되었는가
오, 중이여 막대기 하나와 옷 한벌과
신발 한짝 모자 하나로 떠돌거나
한 방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않는 중이여
육식을 하지 않으며 산속에 살고
바람 속에 잠이 드는 저 불굴의 중이여
내 생은 내 육신 속에서 죽어가
이젠 영영 다다를 수 없는 길이 되었는가
어떤 사랑도 꽃도 나의 적은 아니었다

* 타이핑 된 걸 필사하는 건 좋은데, 이 포스팅처럼 적은 걸 자판으로 두드리자니 예전처럼 즐겁지 않구나. 아날로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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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

from text 2024/07/17 19:28
지난 삶을 생각하니 기억의 총량을 벗어날 수 없구나. 남은 기억이 지난 삶의 전부로다. 언젠가부터 더해지는 기억은 없고 잊혀지거나 지워지는 기억만 있다. 용서해 다오. 모자란 놈이 모질진 않았으나 미덥지도 않았겠다. 며칠 전에 보니 배롱나무 꽃이 피었더라. 죽으면 새로운 세계로 드니 설렌다는 사람도 있다더만. 모를 일이다.

근래 만년필로 글씨 쓰는 재미에 빠져 있다. 내가 가졌거나 가진 가장 격렬한 취미라면 걷기나 등산이겠고, 매양 잔잔한 재미에만 빠졌거나 빠져 있는데 고요한 것 하나 더하게 되었다. 우선 구입한 건 펠리칸 M215 F닙과 4001 블루 블랙 잉크, 클레르퐁텐, 미도리, 로디아 노트와 밀크 프리미엄 복사용지, 그리고 펜코 클립보드. 반야심경과 몇 편의 시, 도덕경과 장자의 어떤 구절들, 그리고 읽고 있는 책과 블로그에 인용하거나 끄적인 글들의 일부를 필사하였고, 글을 쓰는 이상의 매력에 빠졌다. 사각거리며 미끄러지고 맺혔다 마르는, 펜과 잉크와 종이의 변주, 그 세계에.

올 장마는 유독 길고 자주 많은 비를 뿌리는구나. 살아갈 뿐 기억하지 못하는 중생에게 기어이 기억의 습한 길을 안내하는 듯이.

늙은호박

from text 2024/07/08 21:02
지난해 구월 금호에서 얻은 한아름짜리 늙은호박, 있는 듯 없는 듯 주방 한 구석에서 오래 묵었다. 아무래도 상했지,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사 잘라본다. 상하긴 개뿔. 주황색이란 이런 것이구나, 단단한 두께 안이 불을 켠 듯 환하다. 노을보다 붉게 빛난다. 전도 부치고 범벅도 만들어 먹어야지. 생각만으로도 구수한 늙은 맛이 난다. 너처럼, 안으로 활활 타오르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두께를 가져야겠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활활 타오르는 속을 갖고, 한결같이 잘 여물어야겠다. 속이 더 붉어 더는 부끄럽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