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내리던 비가 멎더니 꽃샘추위가 티 나게 봄을 부른다. 매섭지도 무디지도 않게, 아닌 척 모른 척. 법주 한잔에, 티 내는 거리와 티 나는 사랑을 생각한다. 창밖으로 푸른 빛이 시들고 소리도 검게 변한다. 저물녘이면 저무는 인연도 시작하는 인연도 다 어여쁘다. 지난날의 나도 나의 지난날도 다 용서가 되고, 발칙한 청춘과 갈데없는 후회도, 가련한 이름들도 다 용서가 된다. 나무의 하늘은 어디인가. 며칠 내리던 비를 핑계로, 오던 길 돌아가던 봄이 마지못해 슬쩍 돌아선다. 그럼, 너도 쉬운 놈이 아니고 말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진리를 탐하거나 사랑을 갈구하고 죽음을 동경하는. 지나고 지난 자리들이 있다. 다시없을 인연과 이름들.
바람을 맞는 작은 생명들아, 열두 번 바뀌는 하루도 어제 정한 내일을 어쩌지 못한다. 어느 해 그날처럼, 오늘은 아무것도 정할 수 없다.
계절이 계절을 노래하던 시절은 지났다. 둘 것은 두고 떠날 것은 떠났다. 이 밤, 잔은 차지 않고 넘친다. 저 나무도 더는 세상을 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