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면 누구나

from text 2025/05/18 17:25
나이가 든다는 것, 늙는다는 게 뭘까. 바람은 작고 고민은 크며 기쁨은 적고 슬픔은 많구나. 싫은 사람은 피하면 그만이고 여전히 좋은 사람은 드무니, 사람은 적고 그리운 날은 많기도 하다. 지난날은 길고 앞날은 짧아서 그런 걸까. 기억이 가물거려 언제 귀밑머리 센 줄 모르겠다.

딱 싫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 아둔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거짓을 일삼고 언행이 가벼운 사람, 여러 잣대를 갖고 있는 사람, 이익이 앞서고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 그들이다. 좋은 사람으로는 우선 진솔하고 담백하면 된다. 싫은 유형의 반대면 족하고, 사회적 식견과 인문학적 교양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감히 바라건대 예술적 소양에 유머와 직관을 겸비하여 인간적인 매력까지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마는.

꼬장꼬장하면서도 부드러운, 다 이해해도 다 받아들이지 않는, 다가오지 않아도 다가가는, 아직은 갈 데까지 가 보는 정신과 자세를 갖고 낙치, 백발에 맞설 일이다. 이만하면 누구나 나머지 청춘을 사르고 말겠다고 노욕을 부리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마무리에 대하여

from text 2025/05/17 16:32
그게 다 착란에 의한 어떤 작난 같은 거지요. 여기 없는 건 거기도 없어요.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오늘이 오듯 작고 단순한 작난 같은 것. 마치 사랑이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흉내내며 살다 가는, 조막만한 그릇들의 밀회 같은 것이지요. 그래요, 오늘은 봄이 길어 뒤숭숭한 별들에 건배합니다. 먼저 간 이들과 아직 남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두루 잘 살았으면 했고, 멋스럽게 늙고 싶었지요. 사랑이나 낭만을 위해서라면 다 걸 것처럼 살았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즐겼으며 다른 잣대를 싫어하고 꺼렸습니다. 해 질 무렵과 가을을 좋아했고, 사람이 좋고 사람이 싫었습니다. 누구나 하는 마무리. 뜬금없이 아래 김영민의 가벼운 고백에서 한 대목 옮깁니다. 그럼요, 언제나 그렇듯 무소식이 희소식이지요.

좋은 가을 하늘이다. 어쩌라는 걸까. 다르게 살아보라는 걸까.

푸른 산그늘에

from text 2025/04/15 19:50
잊자 잊어버리자 별 거 있나 그렇게 세월만 보내다 그저 사람이 좋아 뭐 다 살자고 하긴 그러다 보면 그저 잊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또 한 시절이 아니 너는 누구니 생각 없는 얼굴이 그저 한 세상이 가고 다시 오지 않을 거긴 어디니 오래 잊으려다 잊으려던 널 까맣게 그 시절이 어디 가고 언제 가버린 건지 기억이 그저 적막이 아니 별 볼 일 없는 꿈이 잊자고 잊어버리자고 없는 세월이 어디서 뚝 잊지 마오 푸른 산그늘에 걸린 처량할손 작은 거미

* 일부러 따온 건 아니지만, 적막과 처량은 마침 읽은 홍자성의 채근담 1장에 같은 단어가 있었다는 걸 사흗날 아침에 덧붙여 둔다. 제대로 붙잡고 읽다가 뒤에 알았다. 책은 도광순 역주로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건데 다른 역자나 출판사의 것은 볼 것도 없이 이게 제일이다. 다음은 그 1장. 바로 전 근사록의 역자도 도광순이었다.

도덕을 지키면서 사는 이는 일시적으로만 적막하지만, 권세에 의지하고 아첨하며 사는 이는 영원히 처량하다. 달인은 사물 밖에 있는 사물을 보며 자신의 배후에 있는 자기를 생각한다. 차라리 일시적인 적막함을 감수할지라도 영원한 처량함은 당하지 않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