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바다를

from photo/etc 2024/09/06 12:18
한 사람이 온전히 다 궁금할 때가 있었다. 온전히 다 그리웠던 적도. 긴 여름이 가고 문득 가을이 오듯, 잠깐 졸았을 뿐인데 지난날이 꿈같기만 하구나. 어느새 세상일도 스스로도 궁금하지 않고, 다가오는 계절이 전하는 말에 조용히 귀기울일 따름이다.

어제 큰아이의 신병 교육훈련 수료식이 있었다. 어느 때보다 훌쩍 커 버린 모습을 보며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아비의 시린 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제복들의 의젓한 모습이 파란 하늘, 시퍼런 바다를 닮았더라. 사진은 0124님의 아이폰 13 미니.

기념사진

from photo/etc 2024/08/31 10:58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중에도 며칠 부쩍 가을 냄새가 난다. 계절은 돌고, 우리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간 세일러 프로피트 캐주얼 M닙과 워터맨 까렌 F닙, 노트 몇 권과 잉크 몇 병, 펜 케이스를 추가하였다. 오랜만에 책도 몇 권 샀다. 무념, 응진 역의 법구경 이야기, 리처드 바크의 환상,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민병일의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당분간 뭘 더 들일 일은 없을 것 같고 기념사진 한 장 남겨 둔다. 이 세계가 즐겁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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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게 장땡

from text 2024/08/03 00:54
펜을 갖고 놀며 이것저것 써보다 여러 번 필사하게 된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하도 이뻐 옮긴다.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며칠 사이 펠리칸 4001 브릴리언트 블랙 잉크와 미도리 페이퍼 패드, 고쿠요 노트 패드를 추가하였고, 몇 가지 만년필을 살펴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년필 커뮤니티를 둘러보다 이웃한 필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모처럼 내가 가진 라이카 카메라와 렌즈들 근황도 잠시 볼 수 있었는데, 렌즈야 그렇다치고 카메라 시세가 너무 올라 깜짝 놀랐다. M6 복각판이 나왔다는 소식도 처음 알았다. 만년필은 꾸준히 새 제품이 나오고 있고 필름 카메라도 새로 나오는 마당에 몇 년째 냉동실에 잠자는 필름도 한번 깨워보나 어쩌나 싶다. 그럼 어마어마한 가격의 기계를 들고 엉터리를 찍게 되겠구나. 아날로그와 아마추어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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