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酉堂記

from text 2025/04/05 10:24
老酉堂에 노니는 老舟 이야기다. 노주는 술을 즐기고 가만히 있거나 때때로 걷는 걸 좋아하여 기꺼이 노유당에서 노는데 어째 헛발질도 잦고 잘 자빠지기도 한다. 즐거이 즐기기란 언제나 난망한 일이다. 노주는 한때 비가 오지 않는 노유당을 떠나 세상을 유랑하였다. 사람을 만나고 길을 잃고 역사를 이루었다. 땅을 갈고 강을 건너 꽃도 피웠다. 시간이 지나 빈손으로 돌아왔으나 다 빈 건 아니었다. 노유당에 노주만 있던 건 아니다. 형상이 달랐을 뿐 뜨내기도 붙박이도 있었다. 노주가 노니는 노유당에 봄이면 서러움이 내려앉고 가을이면 일찍 어둠이 내려앉았다. 노주는 노을이 눈처럼 내리는 날이면 오래된 술항아리를 꺼내 노유당 그늘에 앉아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거나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 항아리가 비어가면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를 때도 있었다. 빈 것이 그리워 밤을 새고 수탉처럼 홀로 울기도 하였다. 뜨내기도 붙박이도 같이 우는 것만 같았다. 간이 콩알만 한 노주는 가만히 있거나 때때로 걷기를 좋아하여 악보가 든 老舟文集 세 권을 남겼다. 빈 술항아리를 깨트리던 날 노주는 문집을 불살라 제를 지냈고, 메마른 노유당에 처음 비가 내렸다.

설중매

from text 2025/03/30 04:20
아무래도 내가 이 길을 걸어왔다기보다 이 길이 나를 데려온 느낌. 그러고 보니 눈 속에 저 매화도 눈이 오거나 쌓인 가운데 핀 게 아니라 피고 나서 눈이 온 것, 만든다기보다 만들어지는 거였다. 그래, 보고 나니 보인 거고 골라서 고른 줄 알았더니 보여서 본 거고 고른 건 내가 아니었구나. 봄은 어딜 갔나. 절반은 초여름 같다가 절반은 초겨울 같더니, 늦봄이라도 부르나, 밤새 바람이 우렁차다.

만개한 매화에 부쳐

from text 2025/03/15 08:08
그리 시시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 걸고 몇 번의 사랑을 하였고 일에 몰두해 보기도 하였다. 세상을 바꾸려 하였고 주변을 바꿔 나를 바꾸기도 하였다. 나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다. 어느 구석에는 봄꽃이 만발하였고 하얗거나 붉어 더욱 몽롱하였다. 취하거나 취하지 않는 삶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바쁘지도 않은 마음이 쉬 길을 찾지 못하기도 하였다. 저 새는 어디서 잠이 들고 저 고양이는 언제 떠나나. 삼월 하늘이 길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