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에 해당되는 글 8건

  1. 낙하 2015/01/31
  2. 안녕 2015/01/28
  3. 고양이와 캐모마일 2015/01/17
  4. 율보뚱보 2015/01/10
  5. 새벽 세 시 2015/01/06
  6. 적막으로 가는 길 2015/01/04
  7. 다른 모든 것처럼 2015/01/04
  8. 열린바다배 2015/01/03

낙하

from text 2015/01/31 22:09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거리낌없이 서로를 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로줄로만 투명한 집을 짓던 수거미가 잠시 쉬는 사이, 어딘가에 단단히 붙어 있던 돌덩이 하나가 떨어져 가을날 잎사귀처럼 돌돌돌 굴렀다. 더는 누가 필요하지 않아도 돌아갈 집은 있어야지. 오롯이 제힘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그를 보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을 사이에 두고 암거미가 끈적이는 가로줄을 거둬 모질게 제 몸에 감고 있었다.

안녕

from text 2015/01/28 19:38
말을 많이 한 날 밤은 공허하다. 그럴듯한 말을 한 날은 더욱 그렇다. 역시 덜 깬 상태가 덜 취한 상태를 능가한다. 멀리 있는 술집도 가지 않는 내가 오늘은 멀리 있는 너를 그린다. 지나는 문장마다 너를 생각하며 빼거나 더한 대목들이 적지 않았다. 온전히 내가 나였던 시절, 고스란히 나의 전부를 던졌던 그때. 철없이 겁도 없이 내닫다 내일도 없이 주저앉기도 했지만, 선홍의 꽃을 끝내 대궁 끝으로 밀어 올리기도 했다. 치열하게 울고 허무하게 지기도 했다. 세상을 버리고 너를 버리고 갈 일이 아득하다. 완벽주의자, 완벽한 현실주의자는 우울로 스스로를 버릴 수밖에 없다더라만,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기로 한다. 세상아, 너를 만나 즐거웠다. 취할 수 있어 좋았다. 기다려라. 이제 너에게 다른 세상을 알려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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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캐모마일

from text 2015/01/17 14:25
이제 너와 난 손도 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절망처럼 눈이 내렸고 인적 없는 거리는 음식물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목적을 달성한 도둑고양이가 다음 목적을 찾아 내세에 몸을 숨긴다. 무언가 단단히 바라는 것이 있었을까. 너를 대할 때만큼 긴장한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 다른 모든 일은 후순위였다. 너와 나를 두고 세상이 뱅그르르 돌던 날, 심장 한구석에 고양이 수염 같은 게 자랐다. 단 한 번도 술잔을 놓고 마주한 적이 없구나. 모락모락 캐모마일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너를 따라 적막으로 사라져도 좋을까. 그만하면 오래 아팠으니, 모른 척 뜨거운 것 모두 두고 따르면 될까. 어느새 우린 손도 잡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딱 그만큼의 거리를 찾았다.

율보뚱보

from clip 2015/01/10 19:51
얼마 전 0124님이 스카이 베가로 찍어 보내 준 버거킹 와퍼 먹는 먹보. 녀석의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난 듯, 전화기에 저장해 두고 몇 번이나 보며 웃었다. 갖은 삽질 끝에 블로그에 처음 올리는 동영상.

 

새벽 세 시

from text 2015/01/06 04:29
새벽 세 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차례를 지켜 아파트 103동이 광장으로 들어서고, 연말부터 수목을 장식하던 알전구들이 마구 스스로를 흔든다. 마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마음의 결은 거미줄 같아 얼마나 섬세하고 위험한가. 무엇이 거미처럼 도사려 끈적이며 성가시게 목숨을 노리는가. 고장난 보일러가 집요하게 돌다 멈추길 반복한다. 빗소리가 단호하다. 104동이 들어서다 멈칫, 하늘을 본다. 멀리 희끄무레하게 때 이른 동이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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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으로 가는 길

from text 2015/01/04 22:29
미련과 욕심을 버리고 가는 거다. 어차피 가뭇없는 일, 떠날 때는 그렇게 두고 가는 거다. 무릇 모든 이별은 솔직한 독백. 하직은 언제나 이른 것이지만 거짓으로도 붙들 길이 없을 때면 웃으며 가는 거다. 그때 더는 비빌 언덕이나 한 걸음 디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아도 좋겠다. 괜찮은 삶이었을까. 그늘도 되고 볕이 되기도 했을까. 전하지 못한 말, 헤아리지 못한 마음은 없을까. 적막으로 가는 길, 다 떠나 홀가분할 수 있을까.

다른 모든 것처럼

from text 2015/01/04 00:07
오랜 옛날, 느린 여자를 알았다. 행동만 느린 것이 아니어서 행동이 지나고 한참 후 사고가 따라왔다. 나무랄 일이 아니었다. 느린 행동은 자주 시간을 되돌렸고, 행동에 대한 판단은 미뤄야 했다. 뒤이은 사고가 행동을 뒷받침하고 행동에 대해 해명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하는 행동이란 얼마나 정당한가. 언제나 화두는 이것이다. 사고가 앞서 행동이 따르지 못할 때, 느린 여자는 알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로와 위안이 어떻게 종말을 고하는지.

사고가 행동을 멈추었을 때 다시, 느린 여자를 알았다. 하지만 이미 행동도 사고를 멈추었고 다른 모든 것처럼 너무 늦게 알았다. 바람이 지나는 자국에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린바다배

from text 2015/01/03 23:02
제3회 열린바다배 전국 어린이 바둑왕전 참가를 위해 서연이와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저도 지난여름 이후 오랜만의 대회 참가였고, 나는 대회장인 한국기원에는 처음이었다. 건물 외관과 계단의 사진들, 대국실 전경이 최근 미생에서 보고 그간 몇몇 자료에서 보아 온 그대로였다. 2014년 전국 초등학생 랭킹 상위자와 한국초등바둑연맹 및 16개 시도협회 추천으로 모인 32명이 열띤 대국을 펼치는 동안 대국실 밖 대기실과 복도에는 여러 도장 관계자들과 학부모들이 서성거렸다. 표정과 몸짓은 제각각이었으나 내심은 같을 터, 아는 사람끼리는 안부와 격려가 오갔고 모르는 사람들은 애써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려운 경기이지만 기왕 먼 걸음에 16강 본선 진출만이라도 바랐으나 기대를 저버리고 2패로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네 명이 한 조씩 더블일리미네이션으로 치러진 예선, 접전 끝에 두 집 반을 진 첫 판의 아쉬움이 컸던지(상대는 이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두 번째 판은 저도 영 기대 이하의 승부를 가린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길 한참 풀이 죽어있더니 제대로 한번 바둑을 해보겠다는 각오를 밝히는데 이렇게 상기된 얼굴을 언제 보았나 싶었다. 한국기원을 제집 드나들듯 할 날이 있을까. 오면가면 눈이 침침하여 나이 먹는 걸 알겠더니, 승패에 일희일비할 일이야 아니겠다만, 갈 길이 멀고 아득하여 마음 둘 곳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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