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 한 주에 한두 번 꼴로 앞산(성불산으로 부르자는 이야기가 있으며, 대체로 산성산과 대덕산을 아울러 일컫는다) 일대를 돌아다녔다. 정상으로 오르기도 하고 둘레를 걷기도 하고 적당히 섞기도 하면서. 낯설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들이 있다. 토굴암, 법장사, 은적사, 대덕사, 안일사 같은 절들과 잣나무숲, 만수정, 성불정, 평안동산 같은 곳, 그리고 고산골, 큰골, 안지랑골, 용두골, 달비골에 이르기까지. 가까이 이만한 데가 있어 계절도, 사람도, 나무와 돌도 예사롭지 않게 볼 수 있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다니다 보면 언제나 말이 없는 줄 알았던 것이 어떤 날은 세상의 비밀을 슬쩍 일러주기도 하고, 세월에 닳고 새 기억에 낡아 엔간히 무디어진 줄 알았던 어떤 것이 가슴 저 밑에서 시퍼렇게 날이 서 오기도 한다. 아무렴, 뜻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결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나고 보면 거기 문득 너와 내가 있는 것이다.
며칠 생각이 많았다. 술도 많이 먹고 오래 걷기도 하였다. 하릴없는 잡생각일 뿐이지만 여물지 않은 새가슴이 뻔한 핑계라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겪는 일이란 게 다 좋은 건 아니구나. 멈췄을 때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리는 이치인가. 오래 걷다 보면 문득 살고 싶어진다. 살고 있음에도 무언가 절박하게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유리알 같던 새가슴이 잠시 여물기도 하고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이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정처 없으나 영락없는 일이다. 근육을 더 길러야 하나. 모를 일이다.
그래, 몸에 안 맞는 옷을 너무 오래 입고 있었다. 갈아입는 데에도,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데에도 조금 시간이 걸릴 테지. 며칠 술에 심신이 약해진 건가. 작은 위로나 잠깐 헤아리는 몇 마디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이 울컥하곤 한다. 갈데없이 늙은 것, 부쩍 무엇을 사거나 어떤 결정을 내리고 바로 후회하는 일도 잦다. 못난 놈이 섣불리 제 경륜을 믿을 것이 아니라 정신줄이나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오후 들어 비가 내린다. 이번 가을비도 밖에만 내리는 게 아니구나. 뿌리를 내릴 것도 아니건만 젖은 속이 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는다. 옛일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어째 노곤하니 하매 봄이 그립다.
십일월 저기는, 가을이 가는 자리로고. 울긋불긋 너는 열명길을, 물들 것 물들이고 가는구나. 산에 난 길은 모두 하산길, 유유자적 너를 따라 걷는다. 지난 인연이사 모를 일, 그예 산빛도 다하였구나. 어기야디야. 가는 가을에 온 산이 무너진다. 다시 오지 말자고, 그 자리에 함께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