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13일, 머꼬의 부탁으로 ‘추천할 만한 한 두서너대여닐고여덟 가지 것들'이란 제목으로 계명대 영화패 "햇살"에 올린 글.
오늘은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에도 비가 오면 꼭 쏘주 한 잔 해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쳤다. 그래도 아마 먹을 것 같다. 이 글이 잘 써지면 그 핑계로다가, 잘 안 써지면 뭐 또 그 핑계로다가. 장마비가 휴일까지 계속 오락가락한다는데, 덩달아 나도 오락가락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간밤에는 피곤한 가운데에도 잠을 청하지 못해 새벽 세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예전에 할매에게 들려주었던 바쳐야 한다에서 시작하여 동지가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나직이 열창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울 뻔 하였으며, 천년여왕, 은하철도 구구구를 거쳐, 찔레꽃 삼절이 기억나지 않아 헤매다 잠이 들었다. 할매 말로는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으면,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처럼 편안하여 잠잠조용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혼자라는 외로움이 강해져 우울지경에 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단다.
가사가 멋져 여기 잠시, 모르는 분들이 많을 듯 하여, 바쳐야 한다 일이절 가사를 일부 옮긴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구차한 목숨으론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 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언제 술 마시고 기회 되면 함 불러주겠다.
아, 그리고 저 찔레꽃은 붉게 피이이는 그 찔레꽃 아니고,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에, 장사익의 절창을 들으며 쓰고 있는데 가사 기억해 쓰기가 어렵다. 봄비!!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허물어지면? 질 때?
에서 도통 기억이 안 난 그 찔레꽃이다. 일이절은 예부터 전해 내려 왔고 삼절은 후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구체적 질감에서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고 누가 써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어째 쓰다보니 영 옆길로 샌 감이 있는데, 아, 방금 이상은으로 바꿨다. 한결 쓰기는 낫군.
추천할 만한 것이라, 글쎄 무엇이 있을까, 짧은 생이지만 인생을 살 찌우는데는 단연 이 세 가지가 아닌가 한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과 깊은, 죽음 같은, 연애, 그리고 책이다. 머꼬는 내가 책을 많이 보는 줄 알고 그 쪽으로 유돌 하는 것 같았는데 글쎄 어쨌든 이 세 가지가 인간을 키우는 데는 그만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하더라도 본을 받을만한 분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를 만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가 스승을 찾는 눈을 갖기도 지난한 일이 아니겠는가.
까지 쓰고 잠시 어머니 전활 받고 어른 계시는 댁에 우유랑 물이랑 가지러 갔다 오고, 할매 와서 같이 저녁 먹고 부치지 않은 편지 들으며 다시 시이자악!!
어쩌면 그래서 책이 그 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될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하고, 살아있으며 내가 만난 인생에 스승이 될만한 분을 꼽는다면, 새로 학교를 다니며 다시 만난 단 한 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재학생 여러분들은 꼭 한 번 그 분의 수업을 듣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사학과 이윤갑 선생님이신데, 나는 그 분에게서 인생에 지침이 될 만한 가치 체계와 산다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를 배웠고, 그리고 아름다운 한 영혼을 만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내가 결혼을 한다면 꼭 저 분을 주례로 모셔야지 생각했었는데, 졸업 후 한 번도 뵙지 못했다. 팔십 팔년인가 구년에 국사 수업을 듣고, 구십 칠팔년에 한국현대사와 한국사회경제사를 들었다. 국사 수업이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지만 현대사와 사회경제사의 주옥같은 강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인데, 다 에이뿔을 받았다. 계절학기 두 학기까지 십사학기 중 에이뿔은 그게 거의 전부이다.
살아가다 보면 한 고비를 훌쩍 뛰어넘은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어느새 커버린 키를 새삼 보게 될 때도 그렇고 쏘주 두 병을 먹고도 끄덕 없을 때도 그럴 수 있다.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깜짝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때가 있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려 다시 도를 닦아야 할 때가 많지만, 반복하다보면 또 훌쩍 한 단계 뛰어넘은 자신을 보게 되곤 하는 것이다. 이성 앞에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다가 각고의 고민과 노력 끝에 여러 이성 가운데에서 한 두어서너 사람 남기고 어떻게 반인륜적이지 않게 정리할까 고민하게 되는 수가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무수한 술병들과 새우깡 봉지들, 불면으로 터져버린 실핏줄들이 모두 한 몫 하였겠지만 나는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찌인한 연애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들의 총체일진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그것만큼 확실하고 깊은 것이 없다. 오래고 깊은 연애에서 실패, 결혼으로 골인한다거나 죽을 때까지 연애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일단 실패라 한다면, 그렇다, 실패한다면 나는 거의 무한정 성장하는 것이다. 웬만한 선악과 미추에 흔들리지 않고 한 잔 술에 취하고 한 동이 술에 견뎌내는 것이다. 인생의 이면을 보고 인생의 또 다른 무엇의 존재를 알고 인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이 인간과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것은, 그 긴 터널을 통과하여, 무사히,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죽어갔던가. 세차게 비 오는 날 술 마이 묵고 하늘 함 경건히 올려다보시라. 그렇게 죽어간 많은 별들이 얼마나 초롱이 빛나며 하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상처를 입으며 생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른 척 한다.
힘든 시절 나를 견디게 해 준 책들이 있다. 언젠가 어느 구석에 그 책들과 준탱이와 부천 노땅이 아니었음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책들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와 박인홍의 벽 앞의 어둠,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윤후명의 몇몇 소설들과 오정희의 대부분의 소설들이다. 그 때를 돌아보면 간간이 나를 지탱케 하던 시집들과 평론집들도 떠오르지만 단연 위의 소설들이 나와 함께 하였다. 반복되는 주사와 끊임없는 술자리를 묵묵히 지켜주던 두 사람은 내 말벗이며 술벗이요 이즈음도 절실한 그 무엇이다.
내가 읽은 많지 않은 책들 중 단 한 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죽음의 한 연구를 든다. 일천 구백 칠십 오년에 발표되었으며, 팔십 육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지금은 같은 출판사에서 상하권으로 나뉘어 새로운 판으로 나와 있다. 한 수도승의 사십일 간의 기록인데 나는 근 일년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매일매일 한 페이지든 한 문단이든, 때로는 며칠간의 기록을 읽어 나갔다. 읽을 때마다 앞부분을 다시 조금씩 읽으며 그 책에 나는 젖어들었다. 처음 조금 읽기 어려워도 꾸준히 조금씩 읽다보면 그 문체의 감칠맛에 빠지고 그 세계의 매력에 흠뻑 젖게 된다. 하루에 하루치의 기록씩 사십일을 투자하여 읽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욕심도 내지 말고 너무 더디 읽지도 말고 하루에 하루치의 분량만, 방학을 이용하여 까짓 이 한 권 함 읽어들 보시라. 사십일 동안 그저 함 다 읽고 한 일주일 쉬었다가 다시 함 읽으시라. 며칠 안 걸릴 것이며 처음 읽을 때와 완연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정독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져 나는 새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대 유리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지.
먼지처럼 가볍게 만나
부서지는 햇살처럼 살자던 그대의 소식 다시 오지 않고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봄이 오는 창가에 앉아 오늘은
대나무 쪼개어 그대 만나는 점도 쳐보았지.
유리 기억 닿는 곳마다 찔러오던 그 시퍼런 댓바람,
피는 피하자고 그대는
유리로 떠나고
들풀에 허리 묶고 우리 그때 바람에 흔들리며 울었었지.
배고픈 우리 아이들
바닷가로 몰려가 모래성 쌓고
빛나는 태양 끌어 묻어 다독다독 배불렸었고.
그대, 지금도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아프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아
물마른 강가에 앉아 있다던 그대와
맑은 물이 되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대는 유리를 떠나고
유리엔 우리가 살아서
오늘은 그대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시퍼런 강이 되기도 하겠지만.
철학과 선배이기도 한 노태맹의 유리에 가면이란 시인데 이 유리가 그 수도승이 수도를 하는 동네 이름이다. 이 시는 일천 구백 구십 오년에 세계사에서 유리에 가서 불탄다 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시집에 실려 있다.
박상륭의 다른 책들은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속편격인 길기도 긴 칠조어론이 있는데 정히 궁금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게 나을 것이고, 소설집으로 열명길과 아겔다마가 있는데 이는 함 읽어볼 만은 하다. 역시 문지에서 나왔다. 근래에 나온 그의 책들은 대충 서점에서 뒤적이다 그냥 나왔다. 점점 형이상학으로 치닫는 그의 세계가 나는 싫다. 어렵다.
나도 새끼 갖고, 그리고 엉덩이 큰 계집의 볼기짝을 두들기며, 그렇게 살고만 싶은 것이다. 계집과 자며, 홍수처럼 사내를 쏟고, 그리고 이튿날은 보습에 묻은 녹이나 쓸어내고 싶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그 모든 풍족치 못한 농부들 모양, 굴비 한 마리 지겟가지에 매달고 싶을 뿐이다. 가난에 거칠어져 가시뭉터기 같은 마누라의 손바닥으로 등을 긁히고 싶은 것이고, 홍역에 죽어가는 자식놈 탓에 인색한 의원 무릎 위에 눈물도 흘리고 싶은 것이다. 목소리가 변해 가며, 마을처자들 댕기나 나꿔채다 돌아와 늦잠을 자는 아들놈이 꾀병을 앓아대는 꼴은 얼마나 흐뭇한 것이냐. 그래 그런 것은 얼마나 선하며, 좋은 것이냐. 그 아들이 마포 상복 자락에다 눈물과 황토를 담아다 아비의 관을 덮어 주는 그 황토 냄새는 또한 얼마나 좋을 것이냐. 썩을 수 있다는 건, 죽을 수 있다는 건, 흩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좋은 일이냐.
열명길에 실린 유리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아 정말 얼마나 좋을 것이냐. 얼마나 좋은 일이냐.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나를 매혹시키고 있는 책들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박병상의 파우스트의 선택, 김종철 선생의 간디의 물레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격월간 녹색평론 등이다. 다들 같은 맥락의 책들인데 꼭 권하고 싶은 책들이다. 대부분 녹색평론사에서 나왔으며 생태학 관련 책들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하여,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한층 높은 차원을 체험하게 해 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에 대하여 이보다 더 명확하고 바른 해답을 나는 아직 모르겠다.
책에서 만난 가장 큰 스승의 한 분이 바로 영남대 영문과 교수이며 녹색평론사를 이끌어가는 김종철 선생이다. 선생의 글들은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가슴을 쿵쾅 내려치는 경구로 가득차 있다. 그 뛰어난 문장 보다 더욱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의 세계에 가득하다. 삶 또한 그러하다고 듣고 있다.
열두시가 가깝다. 혼자 기다리다 잠든 할매가 아리다. 세탁기에 든 빨래 널고 이제 자리에 들어야겠다. 모두들 아름다운 꿈들 꾸시기를 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으로 그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곧 현실이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비는 잠시 그치고 또 한 세월 가고 겨울이 기다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자.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구로자와 아끼라의 꿈, 그 마지막 즈음 나오는 마을 풍경, 그 세계에 살고 싶다.
오늘은 종일 비가 내렸다. 저녁에도 비가 오면 꼭 쏘주 한 잔 해야지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그쳤다. 그래도 아마 먹을 것 같다. 이 글이 잘 써지면 그 핑계로다가, 잘 안 써지면 뭐 또 그 핑계로다가. 장마비가 휴일까지 계속 오락가락한다는데, 덩달아 나도 오락가락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간밤에는 피곤한 가운데에도 잠을 청하지 못해 새벽 세시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예전에 할매에게 들려주었던 바쳐야 한다에서 시작하여 동지가며 타는 목마름으로를 나직이 열창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다 울 뻔 하였으며, 천년여왕, 은하철도 구구구를 거쳐, 찔레꽃 삼절이 기억나지 않아 헤매다 잠이 들었다. 할매 말로는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들으면, 사람은 엄마 뱃속에서처럼 편안하여 잠잠조용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혼자라는 외로움이 강해져 우울지경에 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단다.
가사가 멋져 여기 잠시, 모르는 분들이 많을 듯 하여, 바쳐야 한다 일이절 가사를 일부 옮긴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구차한 목숨으론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 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언제 술 마시고 기회 되면 함 불러주겠다.
아, 그리고 저 찔레꽃은 붉게 피이이는 그 찔레꽃 아니고,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에, 장사익의 절창을 들으며 쓰고 있는데 가사 기억해 쓰기가 어렵다. 봄비!!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허물어지면? 질 때?
에서 도통 기억이 안 난 그 찔레꽃이다. 일이절은 예부터 전해 내려 왔고 삼절은 후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구체적 질감에서 확연히 차이를 보인다고 누가 써놓은 걸 본 적이 있다.
어째 쓰다보니 영 옆길로 샌 감이 있는데, 아, 방금 이상은으로 바꿨다. 한결 쓰기는 낫군.
추천할 만한 것이라, 글쎄 무엇이 있을까, 짧은 생이지만 인생을 살 찌우는데는 단연 이 세 가지가 아닌가 한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과 깊은, 죽음 같은, 연애, 그리고 책이다. 머꼬는 내가 책을 많이 보는 줄 알고 그 쪽으로 유돌 하는 것 같았는데 글쎄 어쨌든 이 세 가지가 인간을 키우는 데는 그만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하더라도 본을 받을만한 분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그를 만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가 스승을 찾는 눈을 갖기도 지난한 일이 아니겠는가.
까지 쓰고 잠시 어머니 전활 받고 어른 계시는 댁에 우유랑 물이랑 가지러 갔다 오고, 할매 와서 같이 저녁 먹고 부치지 않은 편지 들으며 다시 시이자악!!
어쩌면 그래서 책이 그 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해당될 아버지와 어머니를 제외하고, 살아있으며 내가 만난 인생에 스승이 될만한 분을 꼽는다면, 새로 학교를 다니며 다시 만난 단 한 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재학생 여러분들은 꼭 한 번 그 분의 수업을 듣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사학과 이윤갑 선생님이신데, 나는 그 분에게서 인생에 지침이 될 만한 가치 체계와 산다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를 배웠고, 그리고 아름다운 한 영혼을 만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내가 결혼을 한다면 꼭 저 분을 주례로 모셔야지 생각했었는데, 졸업 후 한 번도 뵙지 못했다. 팔십 팔년인가 구년에 국사 수업을 듣고, 구십 칠팔년에 한국현대사와 한국사회경제사를 들었다. 국사 수업이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지만 현대사와 사회경제사의 주옥같은 강의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담인데, 다 에이뿔을 받았다. 계절학기 두 학기까지 십사학기 중 에이뿔은 그게 거의 전부이다.
살아가다 보면 한 고비를 훌쩍 뛰어넘은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어느새 커버린 키를 새삼 보게 될 때도 그렇고 쏘주 두 병을 먹고도 끄덕 없을 때도 그럴 수 있다.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깜짝 않고 담담히 받아들일 때가 있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려 다시 도를 닦아야 할 때가 많지만, 반복하다보면 또 훌쩍 한 단계 뛰어넘은 자신을 보게 되곤 하는 것이다. 이성 앞에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다가 각고의 고민과 노력 끝에 여러 이성 가운데에서 한 두어서너 사람 남기고 어떻게 반인륜적이지 않게 정리할까 고민하게 되는 수가 사람에게는 있는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무수한 술병들과 새우깡 봉지들, 불면으로 터져버린 실핏줄들이 모두 한 몫 하였겠지만 나는 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찌인한 연애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들의 총체일진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그것만큼 확실하고 깊은 것이 없다. 오래고 깊은 연애에서 실패, 결혼으로 골인한다거나 죽을 때까지 연애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일단 실패라 한다면, 그렇다, 실패한다면 나는 거의 무한정 성장하는 것이다. 웬만한 선악과 미추에 흔들리지 않고 한 잔 술에 취하고 한 동이 술에 견뎌내는 것이다. 인생의 이면을 보고 인생의 또 다른 무엇의 존재를 알고 인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주 만물이 인간과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것은, 그 긴 터널을 통과하여, 무사히,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죽어갔던가. 세차게 비 오는 날 술 마이 묵고 하늘 함 경건히 올려다보시라. 그렇게 죽어간 많은 별들이 얼마나 초롱이 빛나며 하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상처를 입으며 생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른 척 한다.
힘든 시절 나를 견디게 해 준 책들이 있다. 언젠가 어느 구석에 그 책들과 준탱이와 부천 노땅이 아니었음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책들은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와 박인홍의 벽 앞의 어둠,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윤후명의 몇몇 소설들과 오정희의 대부분의 소설들이다. 그 때를 돌아보면 간간이 나를 지탱케 하던 시집들과 평론집들도 떠오르지만 단연 위의 소설들이 나와 함께 하였다. 반복되는 주사와 끊임없는 술자리를 묵묵히 지켜주던 두 사람은 내 말벗이며 술벗이요 이즈음도 절실한 그 무엇이다.
내가 읽은 많지 않은 책들 중 단 한 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죽음의 한 연구를 든다. 일천 구백 칠십 오년에 발표되었으며, 팔십 육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지금은 같은 출판사에서 상하권으로 나뉘어 새로운 판으로 나와 있다. 한 수도승의 사십일 간의 기록인데 나는 근 일년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매일매일 한 페이지든 한 문단이든, 때로는 며칠간의 기록을 읽어 나갔다. 읽을 때마다 앞부분을 다시 조금씩 읽으며 그 책에 나는 젖어들었다. 처음 조금 읽기 어려워도 꾸준히 조금씩 읽다보면 그 문체의 감칠맛에 빠지고 그 세계의 매력에 흠뻑 젖게 된다. 하루에 하루치의 기록씩 사십일을 투자하여 읽기를 권해 마지않는다. 욕심도 내지 말고 너무 더디 읽지도 말고 하루에 하루치의 분량만, 방학을 이용하여 까짓 이 한 권 함 읽어들 보시라. 사십일 동안 그저 함 다 읽고 한 일주일 쉬었다가 다시 함 읽으시라. 며칠 안 걸릴 것이며 처음 읽을 때와 완연히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정독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져 나는 새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대 유리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지.
먼지처럼 가볍게 만나
부서지는 햇살처럼 살자던 그대의 소식 다시 오지 않고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봄이 오는 창가에 앉아 오늘은
대나무 쪼개어 그대 만나는 점도 쳐보았지.
유리 기억 닿는 곳마다 찔러오던 그 시퍼런 댓바람,
피는 피하자고 그대는
유리로 떠나고
들풀에 허리 묶고 우리 그때 바람에 흔들리며 울었었지.
배고픈 우리 아이들
바닷가로 몰려가 모래성 쌓고
빛나는 태양 끌어 묻어 다독다독 배불렸었고.
그대, 지금도 유리에 가면 그대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제 아프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아
물마른 강가에 앉아 있다던 그대와
맑은 물이 되어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어쩌면 그대는 유리를 떠나고
유리엔 우리가 살아서
오늘은 그대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시퍼런 강이 되기도 하겠지만.
철학과 선배이기도 한 노태맹의 유리에 가면이란 시인데 이 유리가 그 수도승이 수도를 하는 동네 이름이다. 이 시는 일천 구백 구십 오년에 세계사에서 유리에 가서 불탄다 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시집에 실려 있다.
박상륭의 다른 책들은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속편격인 길기도 긴 칠조어론이 있는데 정히 궁금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게 나을 것이고, 소설집으로 열명길과 아겔다마가 있는데 이는 함 읽어볼 만은 하다. 역시 문지에서 나왔다. 근래에 나온 그의 책들은 대충 서점에서 뒤적이다 그냥 나왔다. 점점 형이상학으로 치닫는 그의 세계가 나는 싫다. 어렵다.
나도 새끼 갖고, 그리고 엉덩이 큰 계집의 볼기짝을 두들기며, 그렇게 살고만 싶은 것이다. 계집과 자며, 홍수처럼 사내를 쏟고, 그리고 이튿날은 보습에 묻은 녹이나 쓸어내고 싶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그 모든 풍족치 못한 농부들 모양, 굴비 한 마리 지겟가지에 매달고 싶을 뿐이다. 가난에 거칠어져 가시뭉터기 같은 마누라의 손바닥으로 등을 긁히고 싶은 것이고, 홍역에 죽어가는 자식놈 탓에 인색한 의원 무릎 위에 눈물도 흘리고 싶은 것이다. 목소리가 변해 가며, 마을처자들 댕기나 나꿔채다 돌아와 늦잠을 자는 아들놈이 꾀병을 앓아대는 꼴은 얼마나 흐뭇한 것이냐. 그래 그런 것은 얼마나 선하며, 좋은 것이냐. 그 아들이 마포 상복 자락에다 눈물과 황토를 담아다 아비의 관을 덮어 주는 그 황토 냄새는 또한 얼마나 좋을 것이냐. 썩을 수 있다는 건, 죽을 수 있다는 건, 흩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좋은 일이냐.
열명길에 실린 유리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아 정말 얼마나 좋을 것이냐. 얼마나 좋은 일이냐.
최근에 읽었거나 읽고 있는, 나를 매혹시키고 있는 책들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박병상의 파우스트의 선택, 김종철 선생의 간디의 물레와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 격월간 녹색평론 등이다. 다들 같은 맥락의 책들인데 꼭 권하고 싶은 책들이다. 대부분 녹색평론사에서 나왔으며 생태학 관련 책들이다.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하여,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한층 높은 차원을 체험하게 해 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에 대하여 이보다 더 명확하고 바른 해답을 나는 아직 모르겠다.
책에서 만난 가장 큰 스승의 한 분이 바로 영남대 영문과 교수이며 녹색평론사를 이끌어가는 김종철 선생이다. 선생의 글들은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가슴을 쿵쾅 내려치는 경구로 가득차 있다. 그 뛰어난 문장 보다 더욱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의 세계에 가득하다. 삶 또한 그러하다고 듣고 있다.
열두시가 가깝다. 혼자 기다리다 잠든 할매가 아리다. 세탁기에 든 빨래 널고 이제 자리에 들어야겠다. 모두들 아름다운 꿈들 꾸시기를 빈다. 혼자 꾸는 꿈은 꿈으로 그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곧 현실이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비는 잠시 그치고 또 한 세월 가고 겨울이 기다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 가자.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구로자와 아끼라의 꿈, 그 마지막 즈음 나오는 마을 풍경, 그 세계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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