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ext 2010/05/30 01:08
보라, 결국 계절은 제자리를 찾았다. 잦은 바람에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누가 뭐래도 세상은 아랑곳없다. 별 탈도 뒤탈도 없다. 흥미로운 일도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그렇게, 건조한 미라의 가슴을 안고 이창동의 시를 보았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 추리소설 몇 편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죄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펄펄 끓던 시절, 나에게도 앤톨리니 같은 선생이 있었거나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다. 그뿐이었다). 직장에서는 어쨌든 10년 근속상을 받았고, 이날과 몇몇 핑계거리가 있는 날엔 많은 술을 마셨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다가 그게 무언지 몰라 주춤거렸으며 버릇대로 일찍 취해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부끄러움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저녁으로 한두 시간씩 서연이의 바둑을 보는 게 낙이라면 낙이다. 닭 모가지를 베고 자는지 잠도 꿈도 짧아졌고 무기력함과 건망만 늘었다. 젠장, 길이 있는데 길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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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송아지 2010/06/01 10:1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어찌어찌 알게되어 가끔 들러 보는데 은근히 중독성 있는 블러그네요.
    나는 피시방 3년 동안 하면서 는것은 스타크래프트 밖에 없는데 직장 생활 하면서 개인 블러그가 있고 주기적으로 글을 쓴다는게 역시 사람은 자기 하기 나름인것 같습니다. 다독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직장에서 여유가 많으신건지, 아니면 부지런하신 건지는 알수가 없고, 다만 그리 술을 먹고 책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나름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추정이 됩니다.

    체력이 따르지 않아 일찍 취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 새벽에 잠이 깨고, 깨고 나면 무의식으로 티비 리모컨을 누르고 날이 밝아오면 한두시간 더 이부자리에서 부비대다가 겨우 아침을 먹고 출근하는 일과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잠과 꿈. 무기력과 건망. 길. 스므살적이었을 때는 고민이 이른 봄날 날리는 벚꽃과 같았다면 마흔을 넘은 나이에는 가을날 떨어지는 오동잎이라는 생각 해 봅니다.

    길.
    바둑판의 가로세로 19줄을 길이라 하지는 않을 거고, 매번 두는 바둑이 다르듯이 길이라는건 그럴것 같기도 하고,
    신영복 선생 말처럼 매번 북쪽을 향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침반. 사람. 고민. 길.

    자네의 블로그가 있어 오늘 아침 잠깐의 여유와 행복이 스쳤습니다.

    • excuser 2010/06/01 16:28  address  modify / delete

      술을 먹고는 운신이 힘들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워 책 보는 것 밖에는 없어 그런 것이지, 여유는 무슨. ^^ 며칠 날씨가 마치 가을날의 그것과 같아 뜬금없는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일 뿐, 송형 말마따나 매번 다르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이 사람의 일이고, 길이고, 꿈이고, 또 사랑이고, 뭐 그럴테지..

      반갑네. 술잔을 마주하고 정담을 주고받는 것만큼이나, 메일로 지난 정취를 느끼는 것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블로그에 이리 본문보다 영양가 있고 긴 댓글을 달아주시니. ㅎ

      체력 비축하시게. 천천히 드시든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쉬 용서가 안 된다네. 조만간 한잔 하세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