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에 해당되는 글 5건

  1. 어쩌면 3 2009/07/27
  2. 형제 2 2009/07/17
  3. 141일째 2009/07/12
  4. 기나긴 이별 2009/07/10
  5. 나들이 2 2009/07/06

어쩌면

from text 2009/07/27 23:18
된통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싫은 건 싫고, 잡문을 잡스럽게 쓰거나 행동에서든 언사에서든 무슨 꼬투리라도 잡힐라치면 이후론 거들떠도 안 보곤 했었는데, 사실 이제는 그런 기억조차 잊고 먹고사는 일인데 다들 절로 이해도 되고 그렇게 헤아리는 것이 또 나이를 제대로 먹는 것도 같았는데, 스스로 꼬락서니가 우습기도 하고 가련키도 하다. 헛살기까지야 했겠냐 싶으면서도 무언가를 놓치고는 그 사실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었으니 더 늦기 전에 이렇게라도 떠밀린 것이 천만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소설가의 각오와 소설집 여름의 흐름을 읽고 든 생각이다. 되풀이 읽는 동안 이대로 살면 될까, 그래도 좋을까, 나중에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산문집을 먼저 읽어서인지(습관처럼 때때로 번갈아 읽어서인지) 데뷔작인 여름의 흐름 한 작품을 빼곤 산문에서의 얼굴이 내내 소설 속에 디밀어져 반갑고 무섭고 때로 참혹했다. 장편을 두어 권 골라 그의 세계에 더 오래 침잠할까 싶다.

소설가의 각오는 한참 전에 보고 놓아두었다 소설집을 읽으며 다시 꺼냈던 것인데 읽는 맛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억지스러움도 느끼고 닿지 못할 세계를 추구하는 아집도 느꼈던 것이 이번엔 치열한 정신과 굳건한 육신을 만나는 긴장과 즐거움을 한가득 느꼈으니 말이다. 소설에서는 무언가 제대로 벼린 느낌, 오래 잊고 있던 어떤 것(무거우나 매력적인 정서랄까, 시적 집요함이랄까, 잘 모르겠다)을 만난 느낌을 잔뜩 받았다. 따로 떼어 한 대목을 고를 수 없는 유형의 글들이라 소설에서도 몇몇 심장을 찌르는 대목을 옮기다 말고, 소설가의 각오에서 한 대목과 거기에 실린 인터뷰 중에서 한 대목만 옮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지나간 자리만이 지나간 것들을 반추할 뿐이다. 어쩌면.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카드에 기대를 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카드가 손에 들어오면 그 자리에서 열어본다. 흔해빠진 카드라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 그리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방법이 훨씬 강하다.

미시마 유키오가 마흔다섯 살 나이로 죽었을 때, 나는 아직 젊었죠. 그래서 이런 일도 마흔다섯 살이 되면 진력이 나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막상 마흔다섯 살이 되고 보니, 그 사람은 왜 겨우 마흔다섯에 포기하고 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문학 자체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문학 주변에 떠도는 아지랑이 같은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이 아닐까 싶군요. 소설가의 재능이란, 소설 이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니까요.

* 벼르던 올림푸스 E-P1은 예판 때 시간 맞춰 주문 넣었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돌연 취소하고 말았다. 오늘 있은 500대 한정 판매 정발도 그냥 지나쳤다. 예판 주문 취소 후엔 짧은 후회도 있었지만 하도 달려들 드니 흥미도 애정도 반감되어 파나소닉 후속 기종이나 20mm 1.7 나올 때까지라도 미뤄둘 생각이다.

형제 2

from photo/D50 2009/07/17 14:01
어제, 그제 진주로 해서 남해에 다녀왔다. 15년쯤 전 남해 여행의 마지막 날 코스를 고스란히 거꾸로 되짚는 것처럼. 다만 그때는 창선삼천포대교와 어지러운 펜션들이 없었고 관광산업에 목숨을 걸었거나 돈에 미친 사람들이 적었다. 어쨌든 모처럼 일상을 벗어난 홀가분함에다 줄곧 따라다닌 비까지, 관광버스 두 대에 나눠 탄 일행들과 무관하게 새록새록 살아나는 추억에 잠길 수 있어 좋았다. 촉석루, 남강장어, 창선삼천포대교, 남해스포츠파크호텔, 부성횟집, 남해별곡식당, 남해대교, 그리고 도둑게와 갯강구떼.

없는 동안 세 모자가 찍은 사진들이 예쁘다. 아비는 세 살 터울 남자 형제로 자라며 서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곱게 정 나누고 연대하기를 바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141일째

from photo/D50 2009/07/12 20:31
141일째. 한창 뒤집고 가끔 배밀이를 시도하며 곧잘 사람을 응시하곤 한다. 백만 불짜리 미소와 가늠할 길 없는 포커페이스를 갖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나긴 이별

from photo/D50 2009/07/10 01:18
사용자 삽입 이미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부터 처음 주도를 단련하는 놈처럼 마셔대던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만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풍만한 유머와 거침없는 품격, 끊임없이 출현하는 술과 담배, 독립적인 인격들과 그만한 쓸쓸함이 넘치는 매혹적인 세계였다. 작가의 이름이 생판 낯설진 않다 했더니 책꽂이 한쪽 구석에 초기작 거대한 잠(The Big Sleep)이 있었다. 책 뒷날개의 메모를 보고 기억을 더듬으니 93년 12월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와 함께 그 옛날 술친구에게 받은 책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이들이 바로 서점에서 그냥 들고 나온 책들인지도 모르겠다. 들어본 적 없는 출판사의 문고판에다 간략한 역자 소개조차 없어 번역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감흥 없이 읽고 그대로 그 소감을 전한 기억이 난다. 젠장, 이놈의 정신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뒤처지고 하잘것없기는 매한가진 모양이다. 어쨌든, 이런 유머를 보라.

그는 풀러사(옮긴이에 따르면 유명한 옷솔 회사란다) 직원이 관심을 보일만한 눈썹을 치켜떴다. / 빅터의 바는 너무나 조용해서 문 안에 들어설 때 기온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 / 분홍빛 머리의 참새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단지 참새만이 쪼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쪼고 있었다. / 염소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는 나를 살짝 쳐다보더니 그보다도 더 살짝 고개를 까딱했다. 그 말고는 미동도 없었다. 더 나은 일을 위해서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모양이었다. / 그는 짧은 빨강 머리에 무너진 허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부인이 희미하고 덧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거의 침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문장들도 즐비하다. 53년 작품이다.

스스로 만든 함정만큼 치명적인 함정은 없다. / 세상의 모든 조용한 바에는 그렇게 슬픈 남자가 한 명씩은 있다. / 그때까지 여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알았을 겁니다. 대부분이라고 해야겠죠. 여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 날개가 너덜너덜해진 벌 한 마리가 나무 창문턱을 기어 다니며 피곤한 듯 가냘픈 소리로 윙윙거렸다. 이제 그래봤자 아무런 소용없으며, 자기는 끝장났고, 너무나 많은 임무를 수행했지만 다시는 벌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 여자가 단지 어린 소녀였던 때도 한 번은 있죠. / 술꾼들은 교육이 안 돼, 친구. 그 사람들은 무너져버렸거든. / 기계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인간은 전화를 사랑하고 혐오하고 두려워한다. /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갔던 때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 나를 사랑하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경쟁자가 없다는 거지. / 그렇지만 그때부터는 뭔가 사라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드는 강철 같은 정신의 1센티미터가. / 범죄는 질병이 아니에요. 단지 증상이지. /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내가 여자기 때문이고 여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 이별을 말하는 것은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들이

from photo/D50 2009/07/06 04:47
조용필이 부르는 떠나가는 배, 지금도 마로니에는, 달맞이꽃을 소리 높여 듣다 보면 소리 높여 따라 울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한다. 며칠, 난데없는 소나기가 반가워 한 시절 그렇게 또 견디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1년에 한 장만 건질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런 주장에 대해 많은 후대의 사진가들은 브레송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했다. "대단히 낙관적인 견해다. 1년에 한 장은 어림도 없다."

곽윤섭의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중에서. 그럴 리야, 그렇게 엄밀하고 까다로웠다면 그 이름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아무렴.

이 도시의 동쪽 끄트머리에 이만한 번화가가 있다니 낯설고 여전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제와 오래 사귄 남자 친구(최근 안정된 일자리를 구했다. 소식을 듣고 축하한다고 보낸 문자에 처제는 무엇보다 남자 친구가 이제 당당해질 수 있어 좋다고 답했다. 별스레 가슴 한 편이 아렸다)가 찾아와 모처럼 사진기를 들고 나선 일요일 나들이.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