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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상으로 2021/03/25
  2. 어린 시절 2008/09/03

일상으로

from text 2021/03/25 07:08
어머니 가시고부터 밑반찬을 사거나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드는 일이 늘었다. 하기 쉬워 예전부터 한 번씩 하던 카레, 김치찌개, 통조림꽁치찌개, 부대찌개, 돼지고기김치볶음을 주로 하고, 어쩌다 기분이 내키면 별식으로 감자샐러드, 김치전, 햄버거를 만들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녀석의 175에 90을 육박하는 식욕 핑계로 최근에는 생전 안 만들던 음식도 제법 만들었다. 찜닭, 애호박돼지찌개, 돼지고기가지볶음, 된장찌개에 삼겹살수육, 오삼불고기, 시래기고등어조림까지. 대식가이자 미식가인 녀석의 말을 빌리면 지금까지 계속 최고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작은 재주가 있었나, 나도 어디서 이만한 음식은 잘 먹어보지 못하였다. 동네 시장에서는 오징어나 고등어, 시래기 같은 걸 사며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의 음식 비법이랄까 주의할 점도 듣고, 때때로 중늙은이를 보는 살가운 눈빛과 홍고추 몇 개 정도는 거저 얻어오고는 한다.

지지난해를 돌아보니 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가던 길들만 떠오른다. 그해 다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봄과 여름의 언덕배기 길과 가을, 겨울의 어두운 골목길과 신천, 그때의 감정과 생각들이 손에 잡힐 것 같다가도 더없이 아련하기만 하다. 지난해에는 이월에 어머니를 여의고 일상을 천천히 회복하였으며 시월에 집을 샀다. 백내장과 녹내장에 알 수 없는 가려움증이 함께 살고 있으며 한 번 술을 마시면 사나흘은 앓는다. 어쩌랴, 온 세상이 신종 감염병으로 시름하는 중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기도 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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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from text 2008/09/03 22:24
어린 시절, 방학은 늘 시골 외가에서 보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시작하는 날 또는 그 이튿날 어머니와 함께 가서 개학 전날이나 전전날 돌아오곤 했다. 초등학교 육년을 내내 그렇게 보냈다. 나를 데려다놓은 그날이나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떠나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마을 어귀 구판장 앞에서 동구 밖으로 멀어지는 어머니는 그 긴 길 위에서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으셨다. 기억이 맞다면 열두 번을 한결같이 그렇게 가셨다. 먹먹한 마음도 잠시, 곧 산으로 들로 개울로 못으로 잘도 돌아다니며 놀았지만, 사는 동안 문득문득 그 뒷모습은 가슴 서늘하게 출몰하곤 한다. 데리러오셨을 때면 저도 모르게 수다스럽고 들뜨던 어린 내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도 그런 내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정직하게 제 살 깎아먹는 법을 그때 배웠다.

대저 얼마 못 가는 마음들이, 그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떤 마음을 이루기도 한다. 이 녀석 오줌인들 못 먹을까 보냐 하다가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태산을 짓기도 하는 것이다. 더러는 색채가 없는 채색화, 먹을 쓰지 않은 수묵화를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살뜰한 휴식, 그 끝에서.

* 어제 저녁 조금 늦게 일을 마치고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과 정영태의 우주관측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바람이 좋아 일부러 멀리 돌아 집까지 걸었다. 날이 좋아지니 다시 산이 그립다. (우주관측을 서점에서 출판사에 주문하는 사이 이원규의 지리산 편지를 다른 서점에 주문하였다. 처음 사는 원규형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