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에 해당되는 글 4건

  1. 백경 2010/02/17
  2. 수선화 2010/01/01
  3. 열하일기 2009/12/10
  4. 그때는 2009/11/22

백경

from photo/D50 2010/02/1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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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다. 몇 해 전인가 내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나고 또 뭍에서는 무엇 하나 흥미를 느낄 만한 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얼마 동안 배를 타고 나가 넓고 넓은 바다를 한번 살펴보았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고 피의 순환을 돕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입가에 험상궂은 주름이 늘 때, 11월의 가랑비처럼 마음속에 축축한 비가 내릴 때, 또 문득 장의사 앞에서 길을 멈추고 길에서 만난 장례 행렬을 뒤쫓게 될 때, 특히 우울한 기분이 나를 지배하게 되어 웬만큼 강한 도덕적 자제 없이는 마구 거리로 뛰어나가 타인이 쓰고 있는 모자를 강제로 벗겨 버리고 싶어질 때, 그런 때면 더욱더 빨리 바다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권총과 탄알의 대용물이 되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휩쓸어 가는 물결이 어지럽게 엇갈리면서 큰 돛대 위에 마지막 가라앉아 가는 인디언의 머리 위를 덮었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다만 곧게 서 있는 둥근 목재 몇 인치와 또 거의 같은 높이로 아슬아슬하게 밀려온 무서운 파도에 박자를 맞추며 얄궂게 나부끼던 기다란 깃발뿐이었다. 그 순간, 붉은 빛 팔과 뒤로 들어 올린 망치가 공중으로 밀려 올라오면서 그 깃발을 서서히 가라앉으려는 그 둥근 목재에 더욱 단단히 못 박아 놓으려 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매가 별 사이의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려와 큰 돛대 꼭대기로 다가오더니 비웃듯이 깃발을 부리로 쪼아 보기도 하며 태쉬테고를 방해하고 있었는데, 그 새가 어쩌다가 그 커다란 날개를 망치와 목재 사이에 끼워 넣자, 금세 물속의 야만인이 죽음의 숨결을 헐떡이며 그 망치를 거기에 내려치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늘 위의 새는 대천사 같은 소리를 지르며 왕자다운 부리를 하늘로 쳐들고, 그 사로잡힌 몸은 에이허브의 깃발에 싸여 그의 배의 길동무가 되어 가라앉아 갔다. 이때 작은 해조의 무리가 아직도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 위를 소리 높이 울어 대며 날고 있었다. 깊고 깊은 물가의 험한 측면에서는 슬픈 듯 흰 파도가 굽이쳐 부딪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무너졌고, 바다의 커다란 수의는 5천 년 전에 굽이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굽이치고 있었다.

허먼 멜빌의 백경(현영민 옮김, 신원문화사) 1장 어렴풋이 보이다의 첫 문단과 135장 추적, 제3일의 결말 마지막 문단. 장엄한 세계, 그 허망한 종말이 수많은 잠언들 속에 끊임없이 명멸한다. 불멸에 대한 필멸하는 욕망들의 처연한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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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from text 2010/01/01 08:02
라일락 향기가 바람에 떠다니는 때란, 그 향기가 바람에 떠다니면서 청춘들의 후각을 자극할 때면, 그 어느 청춘인들,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으리라. 꽃향기만으로 가슴 설레는, 그 고운 청춘의 시절에, 그러나, 나는, 그리고 해금이는, 해금이의 친구들은 참으로 슬펐다. 속절없이, 속절없이, 꽃향기는 저 혼자 바람 속에 떠돌다가, 떠돌다가 사라지고 나는, 해금이는, 해금이 친구인 우리는, 저희들이 얼마나 어여쁜지도 모르고, 꽃향기 때문에 가슴 설레면 그것이 무슨 죄나 되는 줄 알고, 그럼에도 또 꽃향기가 그리워서 몸을 떨어야 했다.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작가의 말 중에서. 아홉 송이 수선화는 그대로 다들 반짝이는 별이었다. 한때나마 별이었던 사람은 푸른 하늘을 보았던 기억보다 선명하게 스스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 남겨진 자들은 남은 과정을 갖고 있는 것. 그러게, 무슨 일에나 미학은 있는 법이니까(백경에서 이스마엘), 늦은 것도, 늦을 것도 없는 일이다.

열하일기

from text 2009/12/10 13:46
돌베개에서 펴낸 완역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었다. 덜 끝낸 숙제와 마쳐야 할 산더미 같은 일들을 두고, KBS 1FM 세상의 모든 음악이 흐르는 저녁에, 때로는 한밤중으로부터, 때로는 콧날 시큰한 새벽에, 풍류와 교양과 운치를 읽어 내렸다. 이스마엘과 퀴퀘그, 에이허브에 오래 빠져들던 사이 잠시 펼쳐나 본다던 것이 이미 시작한 여행길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인데, 가히 민족문학사와 세계의 고전으로 치켜세울 만했다.

박지원의 모습은 유학의 뿌리가 워낙 질기고 깊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어렴풋이 갖고 있던 실학자의 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 시대에 세계를 주유하던 지식인들의 고졸한 품격은 아마도 (과학적)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리라. 아무렴, 충분한 근대적 안목의 미비(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허나 신분제를 위시한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보다 나을 것도 없는 체제에 살고 있으면서 그만한 인물과 담론이나마 찾을 길 없는 것은 행인가, 불행인가)를 아쉬워하기보다는 옛 사람의 산 같은 고담과 물 흐르듯 한 준론을 이렇게나마 엿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 다만 어제도 오늘도 없을 그 같은 담론의 자리와 그 곁자리에라도 끼일 수 없는 천박한 수준과 가련한 처지를 한탄할밖에.

열하일기를 읽던 어느 일요일 한낮, FM 우리가곡에서 테너 이영화의 겨울 강(한여선 시, 임준희 작곡)을 들었다.

마른 갈꽃 흔들며 겨울이 우는 소리
홀로 찾아와 듣는 이 누구인가
푸르게 흐르는 저 강물처럼
세월도 그렇듯 흘러갔거니
쓰러진 물풀 속에 길 잃은 사랑
하얗게 언 채로 갇혀 있구나
그 어느 하루 떠나지 못한 나룻배엔
어느 나그네의 부서진 마음인가
소리 없이 눈은 내려 쌓이는데
언 하늘 마른 가슴 휘돌아
또다시 떠나는 바람의 노래
나그네 홀로, 홀로 서서 듣고 있구나

아, 누구라서 이미 세상일을 알고 짐작대로 조각할 수 있을지언정 서로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from text 2009/11/22 19:09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보았다. 오랫동안 허먼 멜빌의 백경을 보는 중에 잠시 집어든 것인데 단숨에 읽고 말았다. 애틋함을 넘는 어떤 저릿함이 있었다. 영혜와 그녀, 경계에 대한 금간 얼굴들에 경의를. 다음은 책의 맨 끝부분에서 한 구절.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김애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와 달려라, 아비는 아껴 읽게 된다. 칼자국을 읽으면서는 서늘할 정도로 아름다운 말들의 잔치에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젠장, 백경을 썼을 때 허먼 멜빌의 나이가 서른셋이었고, 김애란은 80년생이다. 어제는 "햇살" 20주년 기념 파티가 있었다. 재학생과 졸업생 육칠십 명이 한데 엉겨 난장을 이루었다. 청년들은 살아있었고 모든 지나간 세대들의 우려는 역시 기우였다. 과연,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